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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2월 12일 화요일 마태복음 12장 14 절 ~ 21 절 <종으로 오신 메시아> 본문
<묵상>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마 12:18)
이 구절의 핵심이 되는 이사야 42장 1-3절은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지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입니다.
위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어떠한 모습으로 왔는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이방에 정의를 베푸실 분인데 크게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시는 온유하신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공개적으로 열변을 토하시거나 정치적인 선동을 하신 적도 없습니다.
박해를 받으셔도 대적하지 않고 겸손하게 맡기신 사역만을 행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원수를 저주하지 않고, 복수를 하지도 않으며 오직 영혼 구원을 위하여 사랑으로 행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약자를 유린하지도 않으셨고 양심의 빛이 희미해진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내가 택한 종'이라고 하셨습니다.
종이라면 가라면 가야 하고, 서라고 하면 서야 하겠지요.
예수님은 종으로 오셨지만 인간에게는 구세주로 오신 겸손하고, 온유하신 사랑 그 자체셨습니다.
만약 저에게 메시아의 임무를 맡기셨다면 철저하게 낮아지지 못하고, 구원을 이루려는데 방해하는 악한 사람들을 저주하고, 때론 능력을 행사하며 재촉하지 않았을까요?
어린 아이를 가르쳐본 사람은 아시겠지만 아이의 눈 높이에 맞춰서 끊임없이 반복해주고, 기다려줘야 하는 것 처럼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평생을 종으로 자신을 낮춰서 사랑을 실천하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메시아의 모습은 마치 패배자의 모습 같아 보여서 인간은 감히 흉내조차 내기 어렵습니다.
죽을때까지 누군가의 집에서 발털이개처럼 더럽고, 누추한 모습으로 그들의 병과 치욕을 다 내 몸으로 받으며 견뎌야하는 일을 누가 할 수 있을까요?
더군다나 그 말로는 비참한 십자가의 죽음이었으니 어떤 사랑이 이런 행위를 실천할 수가 있을까요?
종으로 오신 메시아가 있었기에 오늘의 죄많은 제가 살 수 있었고, 질병과 모든 처절한 모습의 우리의 험악한 인생을 짊어지신 예수님이 계시기에 우리는 살아갈 수 있을 것을 생각하니 감사하고 감사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마태복음 12 장 14 절 ~ 21 절>
14.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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