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나단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 레위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시므이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 모든 남은 족속도 각기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리라
<묵상>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슥 12 :10)
위의 구절에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옆구리를 찌르는 그림이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찌르는 자도 이스라엘 사람이고, 찔림을 당하는 예수님은 다윗의 집안인 이스라엘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셨지만 예수님이 찔림을 당하고 십자가에 잔인하게 못박는 고통을 주셨습니다.
이 고통이 끝나야 하나님의 궁극적인 개입과 섭리가 우리에게 임한다니 우리는 정말로 아이러니한 존재들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돌아가시지 않으면 받을 수 없는 구원의 은총이니 말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그야말로 역설적인 삶이고 그가 당하는 고난에 비해 너무나 온유하신 지도력은 고난을 통해 승리를 이루십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뒤틀려있는 것 같습니다.
강하고, 목소리 크고, 돈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그렇게 고난당하셨는데도 여전히 우리의 세상을 주름 잡고 있는데 사랑과 용서와 온유함으로 이 뒤틀린 것들에게 경고하고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너무나 미약해 보입니다.
예수님께 한 발을 들여놓으면 세상과 적이 될 것 처럼 양보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고 나의 몸을 휘감고 있는 세상은 많이 잘못되어 있고, 더럽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죽는 날까지 저는 예수님과 세상에 양다리를 걸치고 힘겹게 살아가야 하는가 봅니다.
하지만
"내가 그들을 향하여 휘파람을 불어 그들을 모을 것은 내가 그들을 구속하였음이라 그들이 전에 번성하던 것 같이 번성하리라내가 그들을 향하여 휘파람을 불어 그들을 모을 것은 내가 그들을 구속하였음이라 그들이 전에 번성하던 것 같이 번성하리라"(슥 10:8)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는 휘파람 소리는 한 눈 팔고 있는 우리를 잠깨우고 붙드십니다.
양치는 목동의 휘파람 소리를 듣고 목동을 찾아 돌아오는 양떼들처럼 우리는 주변에 낭떠러지가 있는지, 늑대가 수풀 속에 숨어있는지도 모르고 먹고, 마시느라 이리저리 흩어져서 세상을 즐기고 있다가 휘파람 소리를 들으면 목동을 찾아 갑니다.
우리의 심령을 깨우는 하나님의 휘파람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부인을 '어이~'하고 부르는 남편이 있습니다.
지금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이분들은 멀리서도 할아버지가 '어이~'하고 부르면 그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그분들만의 특이한 호칭법이 있듯이 우리에게도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휘파람 소리가 들리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