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나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가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에게 이르되 네가 이 일을 행하지 말 것이니라 네가 이스마엘에 대하여 한 말은 진정이 아니니라 하니라
<묵상>
정치적 기반이 약한 시드기야 왕은 예례미야를 신하들의 말을 쫓아 구덩이에 집어 넣습니다.
다윗시대의 사울 왕이 그랬던 것처럼 사람을 두려워하는 시드기야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를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오늘 날 우리도 우리를 어렵게 하는 갈등 가운데 빠져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오늘의 만나에서는 기적처럼 예레미야를 돕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성경에서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이 많았지요.
창세기 시대에는 노아가 그랬고, 기생 라합도 여호수아와 갈렙을 도왔고, 선한 사마리아인도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류에 편승하지 않는 혹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의로운 남은 자를 남겨 놓으십니다.
엘리야 시대에는 바알신에게 무릎 꿇지 않은 7,000명을 남겨 놓았습니다.
에벳멜렉은 왕에게 간청하여 예레미야를 살려 냅니다.
"내가 반드시 너를 구원할 것인즉 네가 칼에 죽지 아니하고 네가 노략물 같이 네 목숨을 얻을 것이니 이는 네가 나를 믿었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시더라"(렘 39:18)
상황이 아무리 어렵다할지라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상황을 견뎌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예레미야의 입장에 오늘날 놓여있다면 정부가 나를 언제 체포할지 구금할지 두려워서 살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닥치는 어려움을 묵묵히 받아들이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예레미야에게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나를 만드신 이가 그리고 나를 세우신 이가 전하는 말씀을 받아야만 하는 선지자는 외롭고 고독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있어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움직이고 사용하고 싶어하는 것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인간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를 내맡기고 묵묵히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잠시 후에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모르는 나의 연약함은 결국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으로서 작은 육신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을 택함으로써 고난을 참고 나아가는 것이 믿음의 사람인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