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Now On...
새소리는 왜 아름다운가 .../ 애니 딜라드의 자연의 지혜중에서 본문
새소리는 왜 아름다운가
Spring
When I was quite young I fondly imagined that all foreign languages were codes for English.
아주 어렸을 때 나는 모든 외국어가 영어를 변환한 암호라고 즐겨 상상했었다.
I thought that "hat," say, was the real and actual name of the thing, but that people in other countries, who obstinately persisted in speaking the code of their forefathers, might use the word "ibu," say, to designate not merely the concept hat, but the English word "hat."
말하자면 'hat' 이 '모자' 라는 사물의 실체를 가리키는데, 고집스럽게 자기 선조들의 암호를 고수하는 다른 나라 사람들은 가령 'ibu' 라는 말을 써서 모자의 개념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hat' 이라는 영어 단어를 뜻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I knew only one foreign word, "oui," and since it had three letters as did the word for which it was a code, it seemed, touchingly enough, to confirm my theory.
나는 외국어라고는 'oui' 라는 한 단어만 알고 있었는데, 그 암호가 나타내는 단어 'yes' 처럼 세 글자로 이루어져 있어서 나의 이론을 인상적으로 뒷받침하는 듯했다.
Each foeign language was a different code, I figured, and at school I would eventually be given the keys to unlock some of the most important codes' systems.
내 생각에 각각의 외국어는 각기 다른 암호를 의미했고, 학교에 가면 가장 중요한 암호 체계를 풀 열쇠를 마침내 찾아내고야 말겠다고 생각했다.
Of course I knew that it might take years before I became so fluent in another language that I could code and decode easily in my head, and make of gibberish a nimble sense.
물론 내가 다른 언어를 굉장히 유창하게 구사하게 되어 내 머릿속에서 쉽게 암호를 만들고 해독하고 또 재치 있는 얘기를 지껄일 수 있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점을 나는 알고 있었다.
On the first day of my first French course, however, things rapidly took on an entirely unexpected shape.
하지만 첫 프랑스어 수업이 있던 날, 상황은 전혀 얘기치 못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I realized that I was going to have to learn speech all over again, word by word, one word at a time---and my dismay knew no bounds.
나는 한 단어씩 하나의 언어 자체를 새로 배워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나의 암울함은 끝이 없었다.
The birds have started singing in the valley.
새들이 계곡에서 노래하기 시작했다.
Their February squawks and naked chirps are fully fledged now, and long lyrics fly in the air.
2월에는 꺼억꺼억, 짹짹 울던 소리가 이제 완전히 부화하여 긴 서정시로 변해 허공을 날아다닌다.
Birdsong catches in the mountains' rim and pools in the valley; it threads through forests, it slides down creeks.
At the house a wonderful thing happens.
새들의 노랫소리가 산 가장자리와 계곡의 웅덩이에 휘감겨 있다. 노랫소리는 숲을 요리조리 헤치며 나아가 계곡 아래로 미끄러진다.
집에서도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The mockingbird that nests each year in the front-yard spruce strikes up his chant in high places, and one of those high places is my chimney.
해마다 앞뜰의 전나무에 보금자리를 트는 앵무새는 높은 곳에서 노래를 하는데, 그 높은 곳 가운데 하나가 우리 집 굴뚝이다.
When he sings there, the hollow chimney acts as a sound box, like the careful emptiness inside a cello or violin, and the notes of the song gather fullness and reverberate through the house.
앵무새가 굴뚝에서 노래할 때면 속이 빈 굴뚝이 소리 상자처럼 작동하게 된다. 세심하게 비워 낸 첼로나 바이올린 내부처럼 말이다. 그러면 앵무새 노래의 선율이 풍부한 색채를 띄고 온 집안에 울린다.
He sings a phrase and repeats it exactly; then he sings another and repeats that, then another.
앵무새는 한 구절을 노래하고는 그것을 정확하게 되풀이한다. 그런 뒤 앵무새는 또 다른 구절을 노래하고 되풀이한다.
The mockingbird's invention is limitless; he strews newness about as casually as a god.
앵무새의 창조에는 끝이 없다. 앵무새는 자기가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무렇게나 새로움을 주변에 뿌린다.
He is tireless, too; towards June he will begin his daily marathon at two in the morning and scarcely pause for breath until eleven at night.
앵무새는 또한 지치지도 않는다. 6월이 될 때 까지 앵무새는 오전 2시에 하루의 마라톤을 시작해서 밤 11시까지 거의 숨도 돌리지 않고 계속 달린다.
I don't know when he sleeps. 나는 앵무새가 언제 자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When I lose interest in a given bird, I try to renew it by looking at the bid in either of two ways.
어떤 새에 대해 흥미를 잃어버리면, 나는 다음 둘 중 어느 한 가지 방식으로 다시 새를 바라보면서 그 새에 대한 흥미를 새롭게 하려 한다.
I imagine neurinos passing through its feathers and into its heart and lungs, or I reverse its evolution and imagine it as a lizard.
즉 질량이 거의 없는 중성미자가 그 새의 깃털과 심장과 폐를 통과하고 있다고 상상하거나 아니면 새의 진화를 거꾸로 올라가 그 새가 도마뱀이라고 상상하는 것이다.
I see its scaled legs and that naked ring around a shiny eye; I shrink and deplume its feathers to lizard scales, unhorn its lipless mouth, and set it stalking dragonflies, cool-eyed, under a palmetto.
비늘 낀 다리와 반짝이는 눈동자의 적나라한 둥근 원을 바라본다. 나는 움찔하면서도 그 새의 깃털들을 뽑아 도마뱀의 비늘로 만들며, 입술 없는 입에서 부리를 떼니어 작은 야자나무 아래에서 차가운 눈을 하고 몰래 접근하는 잠자리에게 준다.
Then I reverse the process once again, quickly; its forelegs unfurl, its scales hatch feathers and soften.
그런 다음 그 과정을 다시 한 번 재빨리 뒤바꾼다. 접히지 않는 앞다리의 비늘엔 깃털이 돋다 부드럽다.
It takes to the air seeking cool forests; it sings songs.
새는 하늘로 올라가 서늘한 숲을 찾아 노래한다.
This is what I have on my chimney; it might as well keep me awake out of wonder as rage.
이 새가 바로 우리 집 굴뚝에 있는 녀석이다. 내가 이 새 때문에 잠에서 깨어나 분노하느니 차라리 경이로움을 느끼며 깨는 편이 낫다.
Some reputable scientists, even today, are not wholly satisfied with the notion that the song of birds is strictly and solely a territorial claim.
심지어 오늘날에도 몇몇 유명한 과학자들은 새의 노래가 순전히 고유한 특정 지역의 산물이라는 생각에 전혀 만족하지 못한다.
It's an important point. 이것은 중요한 논점이다.
We've been on earth all these years and we still don't know for certain why birds sing.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지구상에 살아왔지만 왜 새가 노래하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
We need someone to unlock the code to this foreign language and give us the key; we need a new Rosetta stone.
이 외국어의 암호를 풀어서 그 열쇠를 우리에게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로제타석이 필요하다.
Or should we learn, as I had to, each new word one by one?
아니면 내가 그래야했던 것처럼, 새로운 말들을 하나하나 배워야 할까?
It could be that a bird sings I am sparrow, sparrow, sparrow, as Gerard Manley Hopkins suggests: "myself it speaks and spells, Crying What I do is me : for that I came."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시인 제러드 맨리 홉킨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새가 "나는 참새, 참새, 참새." 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홉킨스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바로 나라네. 나는 그것 때문에 왔다네.' 라고 새가 외치고 있다." 라고 했다.
Sometimes birdsong seems just like the garbled speech of infants.
때때로 새소리는 유아들이 제멋대로 바꿔 하는 말과 꼭 닮았다.
There is a certain age at which a child looks at you in all earnestness and delivers a long, pleased speech in all the true inflections of spoken English, but with not one recognizable syllable.
어떤 시기에 아이는 열심히 당신을 바라보면서 진짜 구어체 억양으로 듣기 좋은 말을 길게 하지만 단 한마디로 알아들을 수 없는 음절들을 말하는 순간이 있다.
There is no way you can tell the child that if language had been a melody, he had mastered it and done well, but that since it was in fact a sense, he had botched it utterly.
그 아이를 향해 이렇게 말할 수는 없다. 만약 언어에 멜로디가 있다면 너는 그 멜로디를 습득해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잘했단다. 하지만 사실 언어는 의미이기 때문에 너는 완전히 실패한 거야. 이렇게 말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Today I watched and heard a wren, a sparrow, and the mocking-bird singing.
오늘 나는 굴뚝새와 참새와 앵무새가 노래하는 것을 보고 들었다.
My brain started to trill why why why, what is the meaning meaning meaning?
왜, 왜, 왜? 의미, 의미, 의미는 무엇일까? 내 두뇌가 지저귀기 시작했다.
It's not that they know something we don't ; we know much more than they do, and surely they don't even know why they sing.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을 새가 알고 있지는 않다. 우리는 새들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고 있고 분명 새들은 자신들이 왜 노래하는지도 모른다.
No; we have been as usual asking the wrong question.
아니다. 우리는 늘 그런 것처럼 잘못된 질문을 되풀이하고 있다.
It does not matter a hoot what the mockingbird on the chimney is singing.
굴뚝에 앉은 앵무새가 무엇을 노래하는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If the mockingbird were chirping to give us the logn-sought formulae for a unified field theory, the point would be only slightly less irrelevant.
만약 통합적 현장 이론을 위해 오랫동안 추구되어 온 공식을 앵무새가 울음으로써 우리에게 전한다 해도, 그 논점은 그저 약간만 관련이 있을 뿐이다.
The real and proper question is: Why is it beautiful?
진정으로 적합한 질문은 이런 것이다. 왜 그 새소리가 아름다운가?
I hesitate to use the word so baldly, but the question is there.
나는 한참을 망설이고 나서야 이 말을 했지만 이것이야말로 적절한 질문이다.
The question is there since I take it as given, as I have said, that beauty is something objectively performed---the tree that falls in the forest---haveing being externally, stumbled across or missed, as real and present as both sides of the moon.
앞서 말했듯이 나는 아름다움이란 객관적으로 성취된 어떤 것, 이를테면 숲에 쓰러져 잇는 나무처럼 외적으로 존재하면서 우연히 마주치기도 하고 또 놓치기도 하고, 달의 이쪽 면과 저쪽 면처럼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당연히 받아들이므로, 이 질문은 타당하다.
This dodified lizard's song welling out of the fireplace has a wild, utterly foreign music, it becomes more and more beautiful as it becomes more and more familiar.
화롯가에서 울려 나오는 이 변형된 도마뱀의 노래는 지극히 이국적인 야생의 음악이다. 그 음악에 점점 익숙해짐에 따라 그 노래는 점점 더 아름답게 들린다.
If the lyric is simply "mine mine mine," then why the extravagance of the score?
만약 노래 가사가 단지 "나의 것, 나의 것, 나의 것" 이라면, 대규모의 악기 편성이 굳이 필요한가?
It has the liquid, intricate sound of every creek's tumble over every configuration of rock creek-bottom in the country.
이곳 하천 바위 바닥의 온갖 형상 위로 냇물이 출렁거릴 때 들려오는 복잡한 물소리를 그 악보는 담고 있다.
Who, telegraphing a message, would trouble to transmit a five-act play, or Coleridge's "Kubla Khan," and who, receiving the message, could understand it?
전보를 칠 때 5막으로 이루어진 희곡을 보내거나 콜리지의 <쿠빌라이 칸>을 보내려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리고 그 메시지를 받았을 때 그것을 이해할 사람은 또 누가 있겠는가?
Beauty itself is the language to which we have no key; it is the mute cipher, the cryptogram, the uncracked, unbroken code.
아름다움 자체는 우리에게 풀 열쇠가 주어지지 않은 언어다. 아름다움은 침묵하는 암호요, 부서지거나 찌그러지지 않은 암호다.
And it could be that for beauty, as it turned out to be for French, that there is no key, that "oui" will never make sense in our language but only in its own, and that we need to start all over again, on a new continent, learning the strange syllables one by one.
프랑스어가 그러한 것으로 판명되었듯이,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열쇠가 없고, 'oui' 라는 말은 그 자체로만 의미를 갖지 우리말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새로운 대륙에서 낯선 음절들을 하나하나 배우면서 모든 것을 전부 다시 시작해야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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