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팔레스타인 지역의 양의 우리는 한 집에 하나씩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동네에 한 개 정도를 크게 만들어 놓고 저녁이 되면 한 곳에 양을 몰아넣는다고 합니다.
아침에 목자들이 우리에 와서 자기들의 양을 부르면 양들이 주인의 음성을 알아듣고 나온다고 합니다.
눈이 무척 나쁜 양은 5미터 밖은 볼 수도 없고, 무척 무능력해서 자신의 콧구멍에 파리가 알을 까도 어찌할 줄도 모르고 병으로 잘 죽는다는군요.
그런데 오늘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
아예 울타리의 문이 되어서 양을 지키신다는 말씀입니다.
절벽이 코 앞에 있어도 모른채 풀을 뜯어먹다가 절벽으로 떨어져 죽는다는 양의 무리는 목자가 없으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오늘 저는 제가 양과 같이 한 치 앞도 못보고 나약한 존재임을 주님께 고백하고 나아가야겠습니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요 11:41)
예수님께서 늘 의식하고 사셨던 단 한 가지는 하나님 아버지셨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 아버지께 묻고 기도하셨던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고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하십니다.
오늘 기도 응답이 있었다면, 아주 작은 미묘한 순간이 우리 생활 속에서 깨달음으로 다가왔다면 우리도 예수님 처럼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제가 예수님께 기도하고, 예수님의 응답에 반응하면서 산다고 생각하면서도 때로는 저도 모르게 제 자신의 교리에 충성하는 것이 아닌지 되짚어보아야 하겠습니다.
사실 예수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발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순종은 지적인 이해가 아니고 미련 없이 기쁨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예수님께 순종하지 않고 이치를 따지면서 불순종의 이유를 만듭니다.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는데 또 그리로 가시는 예수님을 책망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말합니다 .
또한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의 무덤을 막아놓은 돌을 사람들에게 시켜서 옮겨 놓게 하십니다.
문둥병과 맹인과 마른 손에 생명력을 불어넣으셔서 살리시는 예수님께서 혼자서 할 수 없어서 도움을 요청하신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사역에 우리를 동참시키고 싶어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를 함께 체험하도록 우리에게 기회를 주신겁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안 계실 때에도 제자들이 혹은 우리가 어떻게 할 것인지 보고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요 11:7-8)
아마 제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저도 그렇게 말했겠지요.
사리로, 논리로 이해가 안되는 상황을 무척 못견뎌하는 저는 어쩌면 예수님이 답답한 사람이라고 떠났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사실은 저의 가장 강점이자 약점을 드러내고 꺽어야하는 어려운 시점입니다.
에효....갈 길이 멀고도 먼 저를 오늘 발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