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Now On...
모든 사랑은 무죄 / 문정희 본문
아이오와 대학 메이플라워 기숙사에서 한 계절을 보내고 서울로 돌아오는 날 아침이었다.
내 방문 안으로 활엽수처럼 산뜻한 종이 한 장이 들이밀어져 있었다.
"사랑은 이다지도 짧고, 망각은 그렇게도 길다."
파블로 네루다의 시구였다.
문득 날카로운 면도날이 영혼 깊숙한 곳을 스친 듯, 아릿한 소름이 돋았다.
옆방 장애인 시인이 보낸 것 같았다. 아니 세계에서 온 작가들은 모두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사랑했었다.
그러니까 그 나이었어......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파블로 네루다, <시>중
열아홉 살에 유명한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를 펴낸 파블로 네루다는
칠레의 시인으로 만년에 노벨상을 받은 세계적인 시의 거장이다.
칠레는 우리나라만큼이나 정치적 격변이 심했던 나라이다. 그는 망명과 외교관 등으로 세계 곳
곳을 떠돌며 격랑의 생을 살았다.
친구인 시인 로르카가 스페인 내란 때 피살당하는 것을 목격한 후, 사회문제에 눈을 뜨고 민중과
함께 고통을 겪었지만 그의 시는 언제나 아름다운 서정과 눈부신 관능으로 꿈틀거렸다.
<일 포스티노>라는 영화 속에 망명지의 시인으로 살아나 더욱 친근해진 시인이다. 인간의 따스함
이 살갗에 닿을 듯이 느껴지는 영화였다.
그의 시집 속의 오묘한 고통들, 뻐근한 절망과 절절한 사랑을 읽으면 핏속에 숨은 열정과 사랑이
봄날의 버들잎처럼 파들파들 일어선다.
"오늘밤 나는 쓸 수 있다. 세상에서 제일 슬픈 구절을/나는 그녀를 사랑했고, 때때로 그녀도
나를 사랑했다....."
네루다의 시구를 제목으로 나도 시 한 편을 썼다.
사랑, 오늘 밤 나는 쓸 수 있다
세상에서 제일 슬픈 구절을
이 나이에 무슨 사랑?
이 나이에 아직도 사랑?
하지만 사랑이 나이를 못 알아보는구나
사랑이 아무것도 못 보는구나
겁도 없이 나를 물어뜯는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열 손가락에 불붙여
사랑의 눈과 코를 더듬는다
모든 사랑에는 미래가 없다
그래서 숨막히고
그래서 아름답고 슬픈
사랑, 오늘밤 나는 쓸 수 있다
이 세상 모든 사랑은 무죄!
졸시, <오늘 밤 나는 쓸 수 있다 - 네루다 풍으로> 전문 / 문학의 도끼로 내 삶을 깨워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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