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Now On...
[스크랩] 심장이 시켰다 / 이 병률 본문
우리는 그 무엇도 상상할 수 없다.
적어도 사람에 관해서는 더 그렇다.
한 사람을 두고 상상만으로 그사람은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아무리 예상을
해봐도 그 사람의 첫 장을 넘기지 않는다면
비밀의 문은 열리지 않는다.
몇 달째 남미를 여행하고 있다는 한 일본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이번이 두 번째 남미 여행이었다. 지난 첫 번째는 세 달 동안 여행을 했지만
이번은 언제 돌아가게 될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한숨을 감추었다. 지난번은
그냥 여행이었다면 이번 여행은 세상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라고 했다. 내 심장이
끄덕끄덕했다.
시간을 럭셔리하게 쓰는 자. 그런 사람이어야 한다. 나에게도 여행은 시간을 버리거나
투자하는 개념이 아니었다. 여행은 시간을 들이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내게 있어
여행은 시간을 벌어오는 일이었다. 낯선 곳으로의 도착은 우리를 100년 전으로, 100년 후로
안내한다. 그러니까 나의 사치는 어렵사리 모은 돈으로 감히 시간을 사겠다는 모험인 것이다.
일사에서는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게 시간이지만 여행을 떠나서의 시간은 순순히 내 말을
따라준다. 사실 여행을 떠나 있을 때 우리가 더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은 돈이 아니라 시간 쪽이질
않은가.
세 달 동안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보니 그 친구의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생각하는 법, 사람을 만나는 법,
돈 쓰는 법, 심지어 먹는 것까지 바뀌어 있었다.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해도 될 정도로 그 친구의 세계에 해일이
몰려왔다.
여행의 많은 순간순간들을 극한 지경으로 몰다보면 그 안에서 선명한 쾌감을 만난다. 막막히 갈 곳도 없고 깊은
밤이 되어 눈 붙일 데가 마땅하지 않다도 그 상황 속에서 서성이다보면 이상할 정도로 강렬한 그 무엇에 대한
애착도 느끼게 된다. 적더도 거지가 아니라 여행자라고 스스로 토닥이며, 이미 멀리 떠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세상 그 어떤 순간과도 비교할 수 없는 상태에 깊숙이 빠져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달라진 그 친구에게 사람들은
물었다. 무엇이 너를 그렇게 바꾸어놓았느냐고.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넓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사는 곳은 단지 세상의 조각에 불과했어. 나하고 정말 다른 사람
들을 만나면서 난 겨우 그 사실을 알았고 그건 충격이었지. 다른 기후 속에서 생각을 하고, 다른 음식을 먹고,
다른 꿈을 살고 있었지. 나의 정반대 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적어도 그 시간에 깨어나서 치열하게 뭔가를 붙들고
있었거든. 난 가능한 한 세상의 모든 경우들을 만나볼 거야."
세상의 모든 경우들과 악수하기 위해선 언어가 문제였으므로 그 친구는 언제나 사람들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 그들과 섞이려고 애썼다. 여행이 끝나는 시점이 언제일진 몰라도 아마도 그때쯤 그의 얼굴은 더 검게
그을려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말했다.
"넌 뭐든 잘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널 좋아하게 될 거야. 왜냐하면 경험이 많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충분히 네 옆에 있고 싶어할 테니까."
...........이병률 여행 산문집 /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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