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Now On...
[스크랩] 독일 레퀴엠 / 황시내의 <황금 물고기>중에서 본문
내게 처음 CD란 물건이 들어온 것은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때였다.
당시 1년 계획으로 미국에 가 계시던 아버지께서 생일 선물로 음대 입시
곡이었던 라흐마니노프의 <프렐류드>가 담긴 호로비츠의 CD 한 장과
카라얀의 베를린 필이 연주한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 한 장을 보내오신
것이었다. 제기랄, 나는 중얼거렸다. 플레이어가 없는데 CD가 무슨 소용
이란 말인가.
라흐마니노프의 프렐류드 in G-Sharp Minor, Op.32 No.12
호로비츠 연주
지금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CD가 보편화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반
이후로, 그 무렵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는 얼리 어댑터들을 제외하고는 CD로
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그리하여 <독일 레퀴엠>은 이후 오래도록
포장도 뜯기지 않은 채 내 책상 위 책꽂이에 꽂혀 있었다. 대입 준비를 하던
그해 밤늦게 수학 문제 같은 걸 풀다가 가끔씩 CD를 꺼내어 들여다보면 정사각
형의 납작한 CD는 수수께끼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해독 불가능
한 문자로 쓰인 마법서와 같은 표정이었다. 드디어 대입 시험이 끝나고 막 유행
하기 시작한 CD 플레이어를 입학 선물로 받고서 처음 <독일 레퀴엠>을 듣던
순간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동안의 노고를 한꺼번에 보상받는 느낌이랄까,
힘든 세상을 살았으니 이제는 쉴 수 있다는 위로를 받는 안도감이 온몸을 감싸
나는 마치 방금 전 세상을 떠난 영혼이 느끼는 것과 같은 홀가분함을 맛볼 수
있었다.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은 그가 레퀴엠을 쓰기엔 아직 젊던 1868년 완성된 곡
으로, 19세기 종교 음악의 정수로 평가받는 걸작이다.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고
천국으로의 인도를 기원하는 보통의 가톨릭 진혼곡들과 달리 이 작품은 키리에,
상크투스, 아뉴스 데이 등 라티어로 된 가사를 쓰지 않고 대신 마틴 루터가 독일어로
번역한 프로테스탄트 성서를 그 텍스트로 사용했다는 점, 처음부터 미사용이 아닌
연주회용으로 작곡되었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죽은 자가 아닌 남겨진 자,
살아 있는 자들의 영혼을 위해 작곡되었다는 점에서 여타 레퀴엠들과 구별된다.
브람스가 이 곡을 쓰게 된 것은 이십대 초반 어머니의 죽음과 스승이자 연적이었던
작곡가 슈만의 죽음을 겪으며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다. 평생을 엄격한 자기 수련 속에 지낸 브람스가 12년이란 긴 세월 동안 신중하게
작곡한 곡이어서인지 한 음절 한 음절이 어떠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듯 느껴지며,
장중하고 경건한 레퀴엠 특유의 분위기 속에서도 프로테스탄트적인 소박함과 금욕
정신이 감지된다.
브람스; 독일레퀴엠 - 콜레기움 보컬레, 필립 헤레베헤, 지휘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은 통상적 미사곡으로서의 레퀴엠에서 발전하여 좀 더 넓은
의미로의 '인간의 영혼을 위로하는 곡'이라는 점에서 훗날 작곡된 브리튼의 <전쟁 레
퀴엠>, 펜데레츠키의 <히로시마 생존자를 위한 애가>, 쇤베르크의 <바르샤바의 생존자>
등 현대 진혼곡들의 선배 격이라 할 수 있겠다. 요즘처럼 지구 곳곳이 증오와 반목,
자살과 테러로 얼룩진 하 수상한 시절에는 하루 저녁쯤 <독일 레퀴엠>을 들으며
가만히 영혼을 쉬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브레히트는 자신이 살아남은 자라는 게
부끄럽다고 했지만,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로 받을 이유는 충분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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