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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표!!!!!!/책 읽어 주는 女子

[스크랩] 유령을 찾아서

오렌지 향기 2011. 12. 14. 12:58

  유령을 찾아서 / 고성복



드라이클리닝 세제로 쓰는 펄크 담긴 통을 들다가 허리에 벼락을 맞았다. 펄크는 물보다 무거운 액체인데 나는 무심코 물 정도의 무게로 가늠하고 번쩍 들어 올린다는 것이 허리뼈에 엄청난 무리를 주었나 보았다. 허리에 벼락이 내다 꽂히는 느낌이었는데 내 기분에 몇 만 볼트 정도 되는 전류가 허리를 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악! 하고 앞으로 꼬꾸라진 후에는 몸을 꼼짝할 수 없었다. 증세가 심하여 앰블란스를 불러 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러나 병원에서도 치료 약이란 것이 따로 없었고 그저 타이레놀 쓰리를 먹고 병상에 꼼짝없이 누워만 있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그래도 병원 침대는 양옆에 철제 가이드가 있어서 이것을 붙들고 한참 애를 쓰면 한 번씩 돌아누울 수는 있었다.
병원에서 하룻밤을 자고 나니 정신이 조금 들고 혼란스럽던 머릿속도 어느 정도 진정 되었다. 그렇지만 몸은 여전히 꼼짝할 수 없어서 한 번씩 돌아 누울 때마다 전신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이런 극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간호사들은 나를 보고 운동을 하라 했다. 돌아눕기도 어려운 나에게 운동이라니. 그들은 아무에게나 '운동은 만병통치약'이라는 구호를 생각 없이 지껄이고 다니다가 나 같은 상태가 중한 환자에게도 그저 습관적으로 운동하라고 욱박 지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틀을 병원 침대 위에서 비비적거리며 보낸 다음에도 별 차도가 없자 나는 슬며시 겁이 났다. 혹시 장기전을 펴야 하는 것이라면 하는 걱정이 일었다. 내가 누워 있으면 세탁소는 문을 닫아야 하니 이대로 누워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움직이지 않는 몸을 일으켜서 걸어 보려 골마루로 나간 나는 골마루 벽에 길게 나무로 붙여 놓은 것이 보행이 불편한 환자를 위한 손잡이라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마치 처음 암벽 등반하는 사람처럼 신중하고도 겁에 질린 걸음걸이로 달팽이같이 움직여 갔다. 그런데 골마루에는 방문이 있고 그 방문에는 나무로 된 가이드가 없었다. 내 눈에 가이드가 없는 방문의 길이는 너무 아득해 보여서 마치 시커멓게 입을 벌린 크레바스 같거나, 건너뛰어야 할 이웃 건물 옥상까지의 거리 같았다. 
몇 발자국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침대로 돌아온 후에 내 병실 안을 처음으로 찬찬히 둘러 보았더니, 병실 안쪽에 커튼이 반쯤 열린 곳에 거기에도 나처럼 거동이 불편한 환자가 누워 있는 것이 보였는데 그 환자의 신체가 억세어 보이고 머리카락이 새카만 것으로 보아서 아마 인디언 아닌가 싶었다.

이 사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인디언 용사는 불편한 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구김살 하나 없이 무척이나 명랑하여서 모든 간호사들을 아주 즐겁게 해 주었다. 그래서인지 간호사들은 그에게 캡틴이라는 칭호를 붙였는데 그는 이 캡틴이라는 말을 듣고도 조금도 쑥스러워하는 반응이 없었다. 어느 때 그가 방을 잠깐 비운 적에 나는 간호사에게 물어보았다. 그를 캡틴이라 부르는 내력이 있느냐 했더니 그의 형이 캡틴이라고 했다. 캡틴이라니? 캐나다 군인 대위를 말하는 건가 하고 어리둥절해 있었는데 간호사가 덧붙인 설명으로 여기서 조금 떨어진 인디언 보호 구역의 추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간호사들은 추장의 동생에게도 도매금으로 추장이라는 애칭을 붙여 주었는데 그러나 그를 캡틴이라 부르는 음성에서는 결코 장난기가 섞이지 않아서 정중한 태도를 느끼게 하였다. 
그는 허리를 쓰지 못하여 휠체어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하도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서인지 더운 날씨에 엉덩이가 짓물러져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예사롭지 않은 상처에도 그는 항상 웃고 떠들고 있어서 그의 옆 침대에 누워 축 처져 있던 나에게조차 활력 회복에 도움이 되었다. 
병원에는 거동이 불편한 환자를 위해 몸을 씻어 주는 젊은 여자 두 명이 병실을 돌았는데 그들이 나에게 와서 물었다. 당신은 언제 목욕을 했는가? 이틀 전이라 했더니 그럼 지금 목욕을 해야 하겠군 하고는 주섬주섬 목욕 준비를 챙기기 시작했다. 나는 크게 당황하여 아, 아니 그게 아니고, 그런 게 아니고 오늘 저녁에 내 아내가 온단 말이거든 했다. 그들은 눈이 똥그래지면서 그래 그게 어쨌다는 이야기인데? 하고 물었다. 나는 답했다. 그러니까 내 아내가 와서 나를 씻겨 준다는 말이지 했다. 두 사람의 처녀 때밀이(?)는 고개를 갸우뚱갸우뚱하면서 우리가 씻어 주면 뭐가 문제가 된단 말이냐? 하면서 너무 이상해했다. 당신은 벌써 이틀이나 목욕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러고도 한시라도 견딜 수 있단 말이냐고 나를 닦달했지만 나는 정말이지 괴상한 느낌이 들어서 온몸에 스멀스멀 송충이가 기는 듯이 소름이 쫘악 끼쳐져 있었다. 나는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할까 하고 끙끙거리다가 내 옆의 캡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양반 말이야, 저 양반이 원할 거야 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캡틴은 로마황제인 양 두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병실 한구석에 커튼으로 가려진 샤워실에 들어가 전신을 씻어 냈다. 남김 없이 말이지. 아주 만족스럽게 샤워를 끝낸 캡틴이 침대 위에서 수건으로 남은 물기를 닦다가 나를 보고 물었다.
"당신은 어느 나라에서 온 사람이오?" 내가 코리아 사람이라고 하자 그는 나더러 "그럼 잰비..에서 온 거냐"라고 물었다. 그가 잰비.. 라고 말한 발음이 내 듣기가 분명치 않았으나 얼른 아프리카의 잠비아가 떠올라서 그것일 것이라 짐작했는데, 이 양반이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데도 잠비아에서 온 거냐고 묻는 것은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 내가 아프리카 사람으로 보인단 말이냐? 아무튼,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힘주어 말했다. 나, 아프리칸이 아니고 코리아에서 이민 온 것이라니까라고 했더니 작은 캡틴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 동네에 한국 사람 하나 있다더라고 난 당신이 그 사람인 줄 알았지." 
 '당신 동네가 어딘데?"
"잰비.." 
"잠비아? 그렇다면 당신이 아프리카에서 산다는 말인가?" 
"아프리카라니? 우리 동네는 여기서 두 시간 남쪽으로 가면 있는 걸."
"어, 그러면 당신 동네 이름이 잠비아라고....?" 
나는 그 잠비아라는 곳, 모르긴 해도 인디언 보호구역 속인데다가 캐나다에서도 아주 외진 곳일 그 골짜기에까지 도대체 어떤 연유로 한국인 하나가 흘러 오게 되었을까 하고 몹시도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겨울이면 영하 45도 혹은 때로 50도까지 내려가는 사정 없이 추운 비정한 이 북녘 땅에 한국인이 하나가 동떨어져 살고 있다니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여기 내가 살고 있는 인구 3만의 작은 도시 포트 멕머레이가 캐나다의 북쪽 막장에 있었고 반경 500킬로미터 내에는 변변히 사람 사는 마을이 하나도 없는 터이었는데 이 막장 도시도 아닌 더 형편없이 작은 골짜기 마을로 들어가 오지 속에서, 그것도 가족도 없이 혼자서, 소문도 없이 박혀 있다니 너무 신비스럽기까지 했다. 
어떻게 혼자 있을 수 있을까? 그렇게 격리되어서 유령처럼 혼자서. 그래도 우리가 사는 포트 멕머레이에서는 다섯 가정이나 한국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 가끔 모이면 밤늦게까지 한국말을 원 없이 지껄일 수가 있는데 말이지.

병원 침대 위에서 사흘이나 비비적거린 후에도 내 아픈 것에 별 차도가 없자 나는 그만 집으로 가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집에 가 있으면 낮에 나의 시중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 불편하기는 하겠지만, 집과 가게가 가까우니 세탁소 일이 꼬였을 때 아내가 내게 자문하는 일이 훨씬 수월해 지겠다 싶어서였다. 
텅 빈 집에 혼자 누워 있으니 참 적막했다. 저녁이 되어서야 아내가 돌아올 것이니 그때까지는 누구도 얼씬하는 기척을 낼 사람이 없다. 병 위문 한다고 찾아올 이웃도 없을 것이다. 다섯 한국 가정이 모두 제 살기가 빠듯하니 이 정도 몸이 상한 것이야 서로 모른 체 넘어가는 것이 통례처럼 되어 있었다.
나는 한 번씩 돌아눕기 위하여 온 힘을 쏟아 몸을 뒤척거려 보았으나 잡고 몸을 돌릴 만한 것이 없는 방바닥 위에서는 돌아 눕기가 허사로 끝나는 때가 잦았다. 그것은 마치 상한 뱀 한 마리가 이불 위에서 배를 문지르고 있다가 한 바퀴 몸을 돌려 뒤집어 보려는 시도를 하는 것 같이도 느껴졌다.
고요한 적막 속에 움직이지 못하고 가만히 누운 나는 이 무료한 시간을 어떻게 죽여낼까?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이것저것 떠올려 보았으나 별 재미가 없던 차에 잠비아의 그 유령이 쏘옥 떠올랐다. 아하, 그 유령 말이지. 잠비아(Zambia)라는 무시무시한 오지에 사는 괴상한 한국인 말이지. 나이도 모르고 생김새도 들은 바 없으나 어쩐지 그는 으스스한 분위기를 가진 사람일 것도 같고 함부로 접근하기 곤란한 음산한 느낌을 달고 있는 사람으로 추측되었다. 나는 일 주일간을 더 누워 있다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그 기간 동안 내 머릿속의 그 잠비아 유령은 온갖 형상으로 바뀌어 가면서 내 무료한 시간을 메꾸어 주었었다. 
다시 활동할 수 있게 된 나는 지도를 꺼내 펼쳐 보았다. 유령의 소재지를 파악하려 한 것이다. 도대체 잠비아란 어디 쯤 붙어 있는 고장인가? 
커다란 지도 위에는 깨알 같은 글씨가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으나 유령이 숨어 있는 잠비아라서 그 글씨마저도 유령처럼 머리를 숙여 감추고 있어서인지 찾을 수가 없었다. 내가 사는 포트 멕머레이에서 두어 시간 떨어진 곳이라 했으니 200킬로미터 반경의 거리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거리만큼 떨어진 남쪽의 63번 국도 변을 샅샅이 살폈으나 찾을 수 없었다. 에드먼턴으로 가는 외길 63번 도로의 남쪽을 뒤져 본 까닭은, 포트 멕머레이가 북쪽의 막장 도시여서 길은 남쪽으로 면한 외길만 나 있었다. 
그러나 찾다 찾다 힘이 든 나는, 문득 내가 뭣 하러 이렇게 애를 쓰고 있는 거야? 하는 생각이 들어 그만 지도를 접어 서랍 속에 넣어 버렸고 따라서 그 잠비아사는 한국 유령도 서랍 속에 갇혀 잊혀 버렸다.

여름이 끝날 무렵 해서 숲에 마른 번개 치는 날이 많았다. 
이 번개는 불씨를 만들어 숲에 불을 지폈다. 너무도 넓은 평원에 한치 빈틈도 없이 서 있는 무진장한 나무들이 걷잡을 수 없는 들불 속에 잠겼다. 들불은 한 달 가량이나 계속해서 타고 있었는데 가끔 뉴스에서 이 불이 우리 사는 도시 가까이 오고 있다고 말해서 겁에 질린 시민들은 무거운 얼굴을 하고 다녔다. 불 먹은 공기가 매캐한 내음을 실어다 주었을 때도 느긋하기로 정평 나 있는 캐내디안들이지만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숲을 태우고 있는 불이 도시의 변전소 근처에까지 가까워져 오고 있다는 소식에도 사재기 같은 혼란의 기미는 눈에 뜨이지 않았다. 
불은 반경 100킬로미터 만큼이나 타고 있었는데 그럼에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별로 없었다. 고작해야 바람이 유리하게 불어 주는 날이면 맹렬히 타면서 다가오는 들불에 대해 맞불을 놓는다든지, 불이 큰길을 건너지 못하게 길옆 나무숲에 물을 축여 놓는다든지, 헬기로 물을 뿌려 불이 넓은 숲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정도가 인간의 한계였다. 불 끄러 나선 용감한 사람들은 대부분 자원 소방수였는데 그들은 불이 지나간 자리에 남아 있는 불씨를 완전히 없애 버리기 위해 땅을 헤쳐서 그루터기에 살아 남아 있는 불씨에 물을 뿌리는 일을 많이 했다. 이 그루터기에 남은 작은 불씨는 눈 속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겨울을 넘긴 후 다음 해에 또 들불을 일으키기도 하니 그 넓은 불탄 자리를 일일이 따라가며 뒤지기란 엄청나게 힘든 일이 되었다.
숲을 태우는 불은 그 진로를 예측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마치 주위의 것들을 깡그리 녹여 가며 흘러가는 용암이 어디로 머리를 틀 것인지 쉽게 짐작기 어려운 것처럼 이 숲을 태우는 큰불도 방향이 이랬다저랬다 무질서했다. 큰불의 범위가 아주 넓어져서 손 쓰기 어려운 지경이었는데 이 불로 해서 당장에 심한 어려움을 겪는 점은 수송 문제였다. 포트 멕머레이와 다른 도시를 잇는 하나뿐인 63번 하이웨이가 불구덩이에 빠져 있으니 그 도로를 통과해야 하는 차량은 극심한 곤란에 처했다. 큰불의 뜨거운 화염도 문제였지만 숲이 그을리면서 내는 연기는 더 큰 재앙이었다. 그래서 화재가 진행되는 달포 가량의 기간 하이웨이는 막혔다 뚫리기를 거듭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라디오와 신문을 가까이했다. 뉴스는 매일 하이웨이 소통 상황을 중계하고 있었는데 그러면서 63 하이웨이가 막힌 날에는 비상도로 격인 881번 비포장도로로 다니라고 권하고 있었다. 
나는 881번 국도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지도를 꺼내 살펴 보았더니 63번 하이웨이가 남으로 내려가다가 비포장의 881번 길을 갈래치고 이 비포장 길은 150 킬로미터가량 우회로를 만들어 남으로 내려간 다음 좌로 꺾어 63 하이웨이와 다시 만나고 있었다. 
아, 이런 길이 있었구나 싶어서 지도에 난 길을 따라 훑어내려 갔다. 
내 아내가 나의 별명을 '비포 전문'이라 부르는 것은 내가 낯선 길을 만날 때마다 기어이 그 길로 한번 다녀 보아야 궁금증이 풀리는 괴이한 버릇을 가지고 있는 이유 때문이었다. 대체로 낯선 길들은 비포장이거나 험해 빠진 고생스러운 길이 대부분이어서 번번이 녹초가 되는 힘든 운전을 감행하고 다녔어도 또다시 모르는 길만 보면 눈이 번쩍 뜨이고 입에 군침이 돌았다. 그러니 이 881번 비포장 길은 머지않은 시간 내에 반드시 해치워야 할 훌륭한 사냥감이 아닐 수 없었다.
지도에 그어 놓은 길을 따라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그 길 주변에 마을이 있나를 살폈는데 길이 63하이웨이와 다시 만나기 얼마 전에 마을이 하나 있었다. 이 마을 이름 옆에 'Indian reserve 194'라는 수식이 있었고 그 마을의 이름으로는 '잰비애' (Janvier)라고 써 놓았었다. 
이것을 본 나는, 내가 전에 유령 사는 마을을 찾느라 지도 위에서 '잠비아' (Zambia)를 찾을 일이 아니었고 잰비애(Janvier)라는 지명을 찾았어야 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늘이 한 점 티 없이 푸르게 맑던 날에, 나는 아내와 함께 잰비애(Janvier)를 찾아 떠났다. 하마터면 아프리카의 잠비아(Zambia)까지 갈 뻔하였으니, 그토록 멀리 갈 일이 없어진 것은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맑고 서늘한 가을 공기 속으로 차가 빠져들었다. 
비포장의 881번 국도는 다니는 차를 볼 수 없이 한적하였다. 길은 가도 가도 온통 키 큰 나무 숲으로 에워 싸여 있었는데 그래서 그것은 마치 내가 화살이 되어 숲의 아우성 속을 꿰뚫고 지나는 느낌이 들었다. 
북녘의 숲은 단조롭다. 그저 소나무이거나, 사시나무이거나, 아니면 사시와 닮은 은사시이거나 그리고 나면 더는 없다. 이 세 가지 나무가 산도 없이 들만으로 이루어진, 질리도록 광막한 대지 위를 뒤덮고 있었는데 나무들은 서로 군집의 형태를 이루고 서 있으면서 같은 종족끼리 뭉쳐 상대를 숲 밖으로 밀어내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고요하나 평온하지 않은 전란이 온 숲에서 들려왔다.
해마다 이맘때면 아내와 나는 세상을 물들이는 노오란 바람을 맞으러 도시를 떠나곤 했다. 연휴가 없는 기간일 때면 세탁소의 문을 걸고서라도 천지가 노랗게 물드는 수풀 길로 나섰다. 북녘 숲에서 물드는 이파리들은 노랑 하나로 단풍이 익었다.  
군데군데 사시나무가 자리를 독점한 비탈진 강가 언덕에는 빛나는 노랑이 마른 가을 햇살을 받아 눈물이 나오도록 황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스치며 지나가는, 노랑 단풍색이 잠기는 검푸른 호수는 호수가 생긴 이래로 여태까지 사람 그림자 한번 비추어 진 적이 없어, 고요함이 호수 둘레로 가만히 내려와 흩어짐 없이 그대로 굳어 있었다. 한번씩 댐을 쌓기 위해 비버가 나무 밑동을 갉는 소리만 없었다면 호수는 완벽한 적막과 함께 있었을 것이다.
포트 멕머레이를 떠난 후로부터 한 채의 집도 눈에 뜨이지 않는 그저 숲만 보이는 881번 국도를 달렸다.
이런 무인지경을 차로 달린 지가 두 시간에 가까워져 오면서 우리는 길가 살피기에 주의를 더 했다.
캐나다의 도로 표지판은 큰길이 아닌 시골 간선도로는 한 자폭에 석 자 길이 정도의 크기로 작아서 눈에 쉽게 뜨이지 않는데다가 두 번씩 같은 표지를 달아 놓는 일이 없으니 한번 그것을 놓치는 날에는 가던 길을 되돌아 찾아 헤매는 일이 잦을 수밖에 없다. 비포장 길임에도 90킬로미터의 시속으로 차가 달리고 있으니 표지가 우리 눈을 스쳐 가는 것은 마치 투수가 던진 볼을 보는 것과 같지 않겠는가? 언제 스치고 지나갈지 모르는 'Janvier'라는 표지 찾기에 열심이었다.

우리가 청색 바탕에 흰 글씨로 잰비에라고 써 놓은 화살표 모양의 표지판을 본 것은 가던 길에서 좌측으로 갈림길이 생기는 삼거리 교차로 얼마 전에서였다. 새로 갈래를 치며 좌로 빠지는 길의 폭은, 차 두 대가 조심스레 지나다녀야 할 만큼으로 좁게 줄어들어 있었다. 그것은 이 길을 통해 닿아 있을 어떠한 마을도 바쁜 움직임을 보이거나 윤택한 기미를 보이는 법이 없을 거라는 것을 미리 암시하는 듯하였다. 이 비포장의 길은 길섶뿐만 아니라 길의 한가운데에도  줄을 지어 민들레니 억새니 하는 풀들이 마른 땅에 뿌리내리고 있어서 길 저편에 있을 잰비애 마을 인디언들이 이 길로 바깥세상으로 다니는 일이 그리 빈번한 일은 아닐 것으로 짐작되었다.
삼거리에서 길이 좌로 갈라지는 그때로부터 노면이 여기저기 심하게 패여 있었다. 이 불안정한 노면 탓에 차는 기껏해야 60킬로의 속력을 낼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나 그 덕분에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의 주변형세를 찬찬히 살펴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삼거리를 지나고부터도 이십 분쯤이나 더 갔을까? 숲으로만 가려져 있던 길옆에 난데없이 200평 남짓한 공터가 보이고 그 위에 거짓말 같이 오두막 하나가 서 있었다. 포트 멕머레이를 떠난 후에 처음으로 보는 사람 사는 흔적이었다.
오두막을 살펴 보려고 차를 세웠다. 
숲 그림자로 어둡게 덮여 있으며, 얼핏 보기에도 생기가 말라 버린, 스산함을 띤 이 낡고 작은 집은 그래서 버려진 집이 아닐까 싶은 인상을 주었다. 작은 집은 여느 집과는 다르게 길 쪽의 면에 유리문을 크게 달아 놓은 것이 아마도 상점 자리가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도록 하였다. 이 무인지경에, 상점이라니? 앞뒤가 맞아떨어지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이건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나 아니면 히말라야 산꼭대기에 상점을 낸 꼴이 아닌가? 내가 고개를 저었더니 아내는 그게 아니라 사무실이나 창고가 아니었겠느냐고 말했다. 사무실? 만일 사무실이라면 더 우스운 이야기가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창고 용도로 쓸려고 했다면 유리문이어서는 안될 일이었다. 나는 유리문을 통해 그 안쪽에 어수선하게 흩어져 있는 남은 집기 몇을 보고 여기에 살던 사람들이 언제 바람 많이 불던 날에 어디론가 바람의 회오리에 빨려 사라졌지 않았겠나 하는 애들 같은 상상을 했다. 낡은 집을 본 후에 찻길로 돌아서다가 아까 미처 못 본 팻말 하나를 보았다. 그것은 부동산 매매 사인이었는데 그것으로 이 오두막이 매물이라는 것, 팔리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오두막을 본 후에는 유령 사는 마을이 머지않아 나타날 차례가 되었다고 기대하고 있었다. 잰비애 유령은 멀찌감치 그 허술한 오두막에 첨병 하나를 숨겨 두고 혹시라도 모를 침입자를 경계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는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지 않다면 도데체 저 무인지경의 외딴 독립가옥은 무슨 용도로 저기에 서 있단 말이냐? 
"도대체 뭘 하는 한국 사람일까? 어떻게 생겼......" 라고 말하는 내 말을 끊고 아내가 자기 말로 이었다.
"그만 하지요. 번번이 같은 말인 걸요. 이제 조금 있으면 알 수 있는 일을 가지고."
벌써 몇 달 전부터 내 머릿속을 채운 이 유령에 대한 의문은 갈 수록 터무니없는 상상을 늘이고 있었는데, 이것은 어떻게 보면 내가 그 유령을 재미로 머릿속에서 키우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쭉 곧게 벋어 있던 길이 모처럼 꺾여져 오른편으로 휘어졌다. 나는 길이 시키는 대로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이때 이 길 위에 차를 향해 달려드는 개 한 마리가 보였다. 생김새가 남루한, 어쩌면 들개에 가까운 모양을 한 개 한 마리가 차를 보고 달려들었다. 개가 차를 보고 대들다니? 캐나다 살면서 처음 당하는 일이었다.

오두막을 본 후 20분쯤을 더 달렸을 때 드디어 인디언 마을이 나타났다. 숲을 베어버린 빈자리에 집들이 듬성듬성 아무렇게나 흩어져 서 있었다. 그것은 그저 집주인 원하는 대로, 세우고 싶은 자리 아무 데에나 인디언 텐트 세우듯 여기저기 세운 모양이라서 퍽 산만해 보였는데 집의 현관 또한 제 각각의 방향으로 나 있었다. 마을은 한산하여 아이들 대 여섯만 느릿하게 걸어서 마을 중앙을 건너고 있었고 그 뒤를 개들이 따르고 있었다. 나는 그들 가까이 차를 몰아갔다. 끈에 묶여 있지 않은 개들은 차로 부딪쳐 와 발로 차를 긁으며 마구 짖기 시작하였다. 개들은 금시라도 물어뜯을 듯이 날카로운 이빨을 있는 대로 다 내보이며 살기를 뿜어댔다. 마치 자동차가 곰이라도 되는 양 사냥터에서처럼 짖어댔다. 나는 차에 탄 채로 나처럼 생긴 사람이 이 마을에 들어오지 않았느냐고 아이들에게 물었다. 아이들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는가 하면 아예 흥미가 없어 듣기 조차하지를 않았다. 마을은 집집의 사이 간격이 한참씩 떨어져서 따로 길이라고는 없이 집사이가 그대로 길이 되었다. 울타리도 없고 집의 경계를 나타내는 어떤 표식도 없었다. 마을의 초입에 서 있는 이 집들은 서른 채 정도가 모여 있고는 더 없었다. 나는 가던 길을 따라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길 따라 한두 채의 집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했다. 인디언 보호구역 안의 집들은 한 곳에만 뭉쳐 있지 않고 길게 퍼져 있어서 생각하던 것보다 더 넓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줄잡아 10킬로미터 정도의 땅에 100채가량의 집이 모이거나 흩어지거나 하면서 서 있었다. 
길옆의 한 집 현관 나무계단에 한 가족 여섯이 오붓하게 앉아 말도 없이 그저 하늘만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뭐 하고 있는 사람들인가? 그들이 올려다보는 하늘에는 솔개 한 마리가 떠 있었다. 그들은 그저 그 솔개 한 마리만 바라보고 앉아 있던 참이었다.
계단 위의 인디언 가족 중 젊은 가장이, 자기 마을에 머물고 있는 이방인 격인 코리안을 내가 어디에서 만날 수 있는지 이야기해 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길죽한 모양으로 벋어 있는 이 마을의 중앙부쯤에 공터가 있고 그 공터에 유치원이 있을 테니 그리 가 보라 했다. 거기가 유령이 사는 집이다. 그런데 이상스러운 것은 왜 그가 유치원에서 머물고 있을까? 혹시 유치원의 보모라도 된다는 말인가? 어울리지 않는 궁금증이었다. 내가 여태 추측하고 있던 유령은, 인디언 마을에 가만히 스며들어 와 소리 없이 엎드리고 있는 창백한 얼굴의 웅담 밀매 업자 정도여서 유치원과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였다. 
길가의 완만한 언덕배기를 밀어 꽤 넓게 만든 공터에는 아직도 약간의 경사가 남아 있었다. 공터 한쪽 면을 다 차지하게 길쭉이 목조 단층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얼핏 보기에 건물 주변이 아주 어수선해 보였다. 목조 건물의 칠이 더러 벗겨져 낡고 칙칙한 외관을 한 이 건물에 유리문이 네 짝 붙어져 있었고 유리문 앞쪽 10미터 만큼 떨어진 곳에 길쭉하지만 끝이 둥근 자그마한 탱크 하나가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햇살이 밝은 건물 외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두워서 컴컴한 유치원 안을 유리문을 통해 들여다보았다. 그랬더니 그 안에는 뜻하지 않게 잡화들이 얹힌 진열대들이 얼기설기 놓여 있었고 음료수 쿨러들이 벽을 둘러 서 있었다. 아니 이것이 어찌 된 일인가? 유치원이 아니라 편의점인 것 같은데? 궁금한 우리는 여닫이문을 열고 안으로 빨려들었다. 실내를 다 채우지 못한 집기들이 군데군데 썰렁한 공간을 남겨 놓은 데다가, 제법 큰 실내를 환히하기에는 너무 부족한 형광등 불빛 탓에 정돈되지 않은 어수선한 실내가 더욱 초라해 보였다. 카운터가 있으나 사람이 없다. 그리고 손님도 없다. 가게에서 내실로 통하는 골마루가 있어 골마루 안으로 고개를 넣어 보았으나 아무 기척이 없다. 어찌 된 일일까? 골마루가 지나는 양편에 문들이 몇 개 보여서 골마루는 아마 방이나 주방으로 통할 것이겠고 그 방이나 주방에 지금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싶었다. 그래서 기다려 보기로 하고 한 동안을 서 있었는데도 사람 소리가 없이 적막했다. 골마루를 등에 지고 가게를 훑어 보며 서 있던 나와 아내는 "아무도 없는 모양인걸?"하고 가게를 나서기 위해 문쪽으로 막 돌아서려는 참에 갑자기 골마루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오며
"어, 어떻게 오셨어요.......?" 하는 한국말 소리를 냈다.
나는 순간 꼼짝없이 얼어붙어 버렸다. 
아, 그 유령이다. 그것도 내 뒤에서 웅크리고 작은 소리조차 없이 있다가 어느 틈에 불시에 뛰쳐나온 것이다. 내가 얼어붙은 상체를 돌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아내가 유령에게 인사를 건네는 밝은 목소리가 들렸다.
"호호, 아무도 안 계신 것 같더니."
나는 느린 동작으로 돌아서며 내 뒤에서 갑자기 출현한 유령의 얼굴을 힐끗 쳐다본 다음 그의 눈동자를 훔쳐 보았는데, 아아...... 그의 눈동자는 내가 상상했던 괴기한 유령 눈이 아니고, 맑고 똘랑똘랑한 선한 눈망울이었다. 그런데다가 곧 저승길에 나설 늙은이도 아닌 서른이 안 되어 보이는 나이의 젊은이가 내 앞에 떠억 버티고 서 있어서 내 머릿속은 순식간에 뒤죽박죽 되어 버렸다.

"아저씨, 여기 소주가 있거든요. 약주 한 잔 드시지요?"
소주라......? 사실은 내가 사람이 그리운 북위 60도의 캐나다 북녘 땅에 살고 있었던 까닭에 잰비애 유령을 찾아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뱃속에 꼬깃꼬깃 넣어 두었던 말 찌꺼기를 한국말로 뱉아내 보고 싶은 갈증이 항상 있어서 그래서 여기에 와 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잰비애 유령을 만났으니 소주 한잔이야 어떨까? 낯선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끊었던 10년 금기를 허물었다. 청년도 한동안 적적했던 모양이었다.
청년은 이름을 제임스라고 불러 달라고 했는데 그가 이 무인고도에 오게 된 내력은 이러했다.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해 어쩔 줄 몰라 했을 무렵에 캐나다 동부로 여행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레이하운드를 타고 다녔거든요. 그 버스 안에서 한국 젊은이를 한 사람 만났는데 걔는 전국을 안 가본 데 없이 돌아다닌데다가 여러 가지 일을 닥치는 대로 하고 다녀서 여러모로 들을 게 많더라고요. 그 말 중에 걔가 퀘벡 주의 인디언 마을 경계에서 편의점도 하고 론드리도 하고 차 수리도 해 주면서 돈을 많이 번 한국 사람 만난 이야기가 있었지요. "

이때 가게에 손님이 왔다며 제임스가 잠깐 자리를 비웠다. 곧이어 가게가 소란해지며 다투는 소리가 들린 다음 손님으로 온 사람의 때 쓰는 소리가 끈질기게 이어졌다. 10분이나 길게 실랑이를 벌인 후에 제임스가 돌아왔는데 오래 다툰 사람치고는 멀쩡해 보였다.
"인디언들이요, 외상을 달래서 골치 아파요. 제네 한 달에 정부 보조금 400불밖에는 돈이 없는데 외상이 400불보다 훨씬 많아서 도무지 갚을 길이 없거든요. 그런데도 외상 달라고 막무가내입니다. 경제관념이라고는 없는 사람들이지요."
하루에도 여러 번 씩 다툼이 벌어지고 더러 유리창에 돌이 날라 오기까지 하는 거친 환경을 겪는 사람 같지 않게 제임스는 생글생글 잘 웃었다.
"경찰에 여러 번 전화를 하곤 하지요. 그러나 경찰들도 뻔한 일이라 성의있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태권도 블랙 벨트라고 하면서 대련 자세를 갖추는 편이 차라리 더 쓸모가 있던걸요."
"그러면 퀘벡주 한인을 흉내 내서 이 가게를 시작한 거네?"
"퀘벡 아저씨보다 이 가게가 여건은 더 낫습니다. 혹시 여기 들어 오는 입구에 가겟집 하나 보셨는지 모르겠네요?"
'아, 그 팔려고 내놓은 허름한 오두막 말이지?"
"네, 그 건물이 중국인이 하던 편의점 건물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외진 곳에서 장사를 벌였을까?"
"그게요, 그 자리가 인디언 보호구역이 바로 끝나는 자리이거든요. 그러니까 인디언 아닌 사람이 장사할 수 있는 곳은 거기가 이 마을에서 제일 가까운 곳입니다."
"그럼 제임스는 어떻게 보호구역 안에서 장사를 벌였나?"
'이 건물은 추장의 것이지요. 이 사업은 추장의 명의로 운영하는 것입니다."
"그럼 제임스는 종업원 격인가?"
"그렇습니다. 이 가게가 원래 유치원 하던 건물인데 제가 편의점을 하게 고쳤습니다. 차 가스도 넣게 탱크와 펌프도 사서 설치했고요. 가스와 담배가 인디언에게는 면세라서 이 사업이 말하자면 독점이 됩니다. 이 면세 혜택을 줄 수 없어 우리한테 경쟁에 진, 마을 입구의 중국인 오두막 살이 가게가 문을 닫고 말았지요."
무서운 경쟁이다. 이 외진 골짜기에까지 한치도 방심할 수 없는 살벌한 기운이 뻗쳐 있었다. 하늘을 나는 솔개만 바라보고 앉은 원주민들이 그들 마을에서 일어나고 있으리라고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치열함을 제임스가 보여 주었다.

돌아가는 길 동안 운전대는 아내가 맡았다. 나는 소주 몇 잔으로 오랜만에 천지가 온화한 꽃 빛으로 물들어서 느긋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의지의 한국인이 세계로 뻗는다더니 유령까지 의지의 한국인이었지?"
출처 : 춤추는 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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