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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서양미술 산책) 미래주의 회화 / 움베르토 보치오니

오렌지 향기 2012. 5. 19. 08:05

보치오니 [갤러리에서의 폭동] 1910
캔버스에 유채 ㅣ 76×64cm ㅣ 브레라 미술관, 밀라노

미래주의(Futurism)는 속도와 역동성, 테크놀로지, 기계주의 등에 확고한 믿음을 두고 회화, 조각, 건축, 패션, 인테리어 디자인, 영상, 음악, 그래픽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미래주의적 실험을 남겼다. 그들은 심지어 미래주의 옷과 요리에 대한 선언을 시도했을 정도로 이탈리아의 전통 미술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해프닝적인 행위를 통해 과거의 미적 취향과 예술제작 과정을 타파하고자 애썼다. 미래주의자들은 19세기 이탈리아 미술이 전통적인 예술적 가치와 조형의식 때문에 퇴보했다는 의식을 바탕으로, 정치적 무정부주의와 젊음과 폭력을 옹호했다. 또한 산업도시와 자동차, 기차 등 산업혁명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도상들을 작품에 담았다. 그들은 사모트라케의 여신상보다 달리는 기차가 더욱 아름답다고 여겼으며, 도서관을 파괴하자는 구호를 거리낌 없이 외쳤다

마리네티(Filippo Marinetti)가 1909년 2월 5일 <라 가제타 델레밀리아(La gazzetta dell'Emilia)>에 미래주의 선언을 출판하고, 이후 프랑스의 <르 피가로(Le Figaro)>(1909년 2월 20일)에 다시 이를 재출판하면서 미래주의는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움베르토 보치오니(Umberto Boccioni), 칼를로 카라(Carlo Carrà), 지노 세베리니(Gino Severini)가 미래주의에 동참했고, 소음(noise)도 음악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 작곡가 루이지 루솔로(Luigi Russolo)도 이 운동에 참여했다. 그들은 미술관, 도서관 등을 비롯한 제도권을 비판했으며, 과학과 테크놀로지를 신봉하였다.

현대문명과 기술을 찬양한 급진적 미술

미래주의자들은 파괴와 폭력을 사회적 발전의 기치로 삼았지만, 동시대의 이탈리아 정치와 문화에 대한 관심과 비판에서 태동했던 아방가르드 흐름이었다. 미래주의는 다다(Dada)와 러시아 구축주의(Constructivism)에 영향을 미쳤지만, 추상미술의 전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피카소의 입체주의(Cubism)에 비해 오랫동안 저평가되었다. 이러한 저평가는 미래주의 미술가들이 일부 이탈리아 파시스트였던 무솔리니와 손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미래주의 조끼

보치오니 [도시의 성장] 1910년
캔버스에 유채, 200×301cm, 뉴욕 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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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치오니는 미래주의 화가로 활동했던 지노 세베리니(Gino Severini)와 함께 자코모 발라(Giacomo Balla) 밑에서 그림을 공부했으며, 1906년 파리에 가서는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미술을 습득했다. 1907년 밀라노로 거처를 옮겨 이탈리아의 유명한 시인으로, 이후 미래주의 선언서를 작성했던 마리네티와 교류하기 시작했다. 그는 미래주의 운동에 있어서 이론가로 활동했으며, 특히 조각에서의 미래주의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1912년 파리를 방문해 브라크(Georges Braque), 아키펭코(AlexanderArchipenko), 메다르도 로소(Medardo Rosso)를 만난 이후에 ‘미래주의 조각’을 제작했으며, 베른하임-젠느(Bernheim-Jeun) 갤러리에서 개최된 미래주의 전시에도 동참했다. 보치오니는 입체주의 조각을 제작했던 레이몽 뒤샹-비옹(Raymond Duchamp-Villon)의 조각을 보고 더욱 미래주의 조각에 몰입했다고 한다.

보치오니의 미래주의는 조각이라는 시각예술에 ‘움직임’을 어떻게 구현할 수 있는지를 모색했다는 점에서 당시로서는 혁명적이었고, 이는 무이브리지(Eadweard Muybridge)가 시도했던 것처럼 카메라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조각 자체의 오브제 뿐 아니라 조각이 놓이는 주변 공간과의 긴장관계를 연구하기 위해 시간과 장소, 색채감 등 모든 요소를 가능한 한 움직이는 모습으로 제작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늘 성공적인 것 만은 아니었다. 또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보치오니는 포병연대에 배치되었으며, 기병대 훈련 중 말에서 떨어져 1916년에 33세의 나이로 요절했기 때문에 실제로 많은 작품을 남기지 못했다.

보치오니는 처음에는 화가로 미술계에 입문했으며 1910년에는 [갤러리아에서의 폭동(Riot in the Galleria)]을 제작했다. 1912년에 [미래주의 조각의 기술적인 선언서(Technical Manifesto of Futurist Sculpture)]를 제작해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을 비롯한 네 명의 조각가들을 비평적인 관점에서 분석했다. 그는 로댕은 고전미를 구현하므로 미래주의와 현대성을 구현한 조각가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대신 메아르도 로소를 ‘혁명적인 현대적’ 개념의 조각가라고 치켜세웠다.

연속적 동작을 표현하는 새로운 미래의 조각

보치오니는 이 선언서에서 '감성적인 효과를 내기 위해서 여성과 남성의 옷을 벗게 하는 예술은 죽은 예술’이라고 주장하며, 누드나 전통적인 인체표현을 강조하던 조각에 반기를 들었다. 여기서 그는 전통적인 소재를 다룬 청동과 대리석 조각상을 공격하였지만, 미래주의적인 조각은 단순하게 현대생활의 외적인 측면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선과 양감을 통해 비전을 제시한다고 주장했다. 보치오니는 1914년에 [미래주의 회화 조각: 조형적 역동성(Futurist Painting Sculpture: Plastic Dynamism)]을 출판해, 미래주의 조각에서 중요한 스피드와 역동성을 이론적으로 풀어나갔다. 미래주의 자체는 입체주의에서 시도한 파편화된 형태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속도감을 강조하기 위해 움직이는 요소를 과감하게 수용하였다. 그들은 직관을 창의력에 있어 중요한 원동력으로 삼았던 베르그송(Henri Bergson)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보치오니 [공간에서 연속성의 독특한 형태] 1914

작자미상 [시모트라케의 여신], BC 331년

보치오니 [공간에서의 병의 전개] 1913년

미래주의 조각은 보치오니가 1913년에 제작한 [공간에서 병의 전개(Development of a Bottle in Space)](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와 1년 후인 1914년에 제작한 [공간에서 연속성의 독특한 형태(Unique Forms of Continuity in Space)](뉴욕 현대미술관에 소장)가 가장 대표적이다. [공간에서 병의 전개]는 세 개의 버전이 존재하는데, 병 주변으로 돌아가는 원형의 형태감은 1911년에 그가 그린 [동시적 비전(Simultaneous Visions)]에서 엿보인 것이지만, 3차원적 공간의 실험은 다른 작품에 비해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굽실굽실한 아르누보의 선이나 아르누보 건축가들이 시도한 조형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는 이 작품을 보고 보치오니야말로 안토니오 가우디(Antonio Gaudi)가 바르셀로나에 지은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ia)를 완성시킬 사람이라고 농담조로 말했을 정도였다.

이런 작품과 함께 보치오니가 제작한 다른 작품을 살펴보면, 조각에서 연속적인 동작을 표현하려고 그가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를 알 수 있다. 무이브리지의 연속적인 동작 사진의 경우, 인체가 공간에서 움직이는 연속 단계를 사진으로 촬영한 것이었지만, 병과 같은 사물의 경우는 이러한 역동성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보치오니 [반-우아함] 1913년

보치오니 [수평적 양감] 1912년

예를 들어 보치오니가 1913년에 제작한 [반-우아함(Antigrazioso)]과 [수평적 양감(Horizontal Volume)]을 비교해보면 조각과 회화 작업을 계속해서 연계해가면서 공간, 양감, 움직임의 요소를 연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모델과 모델 주변의 공간을 서로 연결하려는 시도를 보여주지만 [공간에서 병의 전개]와 같은 작품에 비하면 여전히 실험적인 가능성만을 제시했다. 물론 이 작품을 제작하면서 보치오니는 피카소가 1909년 제작한 입체주의 조각인 [두상(Head)]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1913년에 찍은 보치오니의 작업실 사진을 보면 [공간에서 연속성의 독특한 형태]와 비슷한 인체조각이 두 개 전시되어 있는데, 이것들은 공간 속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역동성을 보여주면서도 날아가기 직전의 로봇 같은 느낌을 부여한다. 보치오니는 근육의 양감을 시도하면서도 형태의 균형을 유지하고자 애썼으며, 이러한 시도는 [두상과 창문의 결합(Fusion of Head and Window)](현재 소실)과 같은 그로테스크한 실험으로 이어졌다.

보치오니의 작업실(1913)

2차원 평면에서 실험한 연속성과 역동성

공간에서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실험했던 보치오니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래주의 화가였던 발라의 그림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보치오니는 연속성과 역동성을 3차원적 공간에서 시도했고, 발라는 2차원의 평면적인 캔버스에서 실험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작업은 다른 어느 미래주의자들보다 서로 연결되어 있다. 발라가 제작한 [거리의 빛(Street Light)](1909)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 비물질적인 ‘빛’의 흐름을 가시화시킨 중요한 작품이었으며, [자동차의 속도(Speed of a Motor Car)](1913)와 [줄을 단 개의 역동성(Dynamism of a Dog on a Leash)](1912)은 보치오니가 고민했던 공간과 속도의 문제를 그림으로 표현한 미래주의자의 결과물이었다.

미래주의는 개념적인 측면에서 건축에서도 큰 족적을 남겼다. 미래주의 건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안토니오 산텔리아(Antonio Sant'Elia)는 새로운 공간 개념을 제시해 공상과학 만화에서 볼 법한 건축 디자인을 드로잉으로 남겼다. 고가도로, 주상복합 건물을 연상시키는 주거공간과 상업공간이 교차하는 공간을 자유롭게 디자인하였고, 3단계로 구성된 도로를 구성해 ‘이동’과 ‘여행’에 적합한 미래주의 도시를 디자인했다. 상텔리아의 혁신적인 공간 개념은 1910년대에는 시공이 불가능했지만 오늘날의 고층 건물 디자인 등 도시 디자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요소를 보여주었다.

발라 [거리의 빛] 1909년

발라 [줄을 단 개의 역동성] 1912년

산텔리아 [신도시]] 1914년

특히 산텔리아가 보여준 공간요소는 1960년대 영국에서 전개되었던 ‘아키그램(Archigram)' 건축 디자인에서도 엿보인다. 소모성과 이동성, 미래의 사람들이 살아갈 ‘유목민’적인 성격 등을 고려해 상상이긴 하지만 ‘걸어다니는 도시(Walking City)’를 디자인했다. 또한 인스턴트 푸드처럼, 인스턴트 도시를 형성해 ‘캡슐’ 공간 개념을 제시했다. 상텔리아의 미래주의 건축에서 제시된 미래지향적인 비전은 건축과 전보를 의미하는 ‘아키그램’의 정신에서 구현되었고, 이후 일본의 메타볼리즘(Metabolism) 들이 시도한 프로젝트에서도 드러났다. 미래주의는 패션과 디자인 영역에서 비전적인 개념 등을 제시했으나 여전히 미래주의 전시는 단편적인 작품 나열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미래주의자들은 그 이전에는 아무도 생각해보지 않은 스피드와 테크놀로지, 예술과 과학을 접목하려고 했으며, 디자인 철학과 비전을 함께 겸비한 중요한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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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심 / 홍익대 예술학과 교수
홍익대학교 영어교육과에서 학부를 마치고 동대학원 미술사학과를 졸업, 1995년에 도미하며 뉴욕대학교 예술행정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2005년 뉴욕대학교 Institute of Fine Arts에서 미술사박사학위를 취득했고, 뉴욕 Fashion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조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조교수.

이미지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MN), 지엔씨미디어, Wikipedia, Yorck Pro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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