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주의(Futurism)는 속도와 역동성, 테크놀로지, 기계주의 등에 확고한 믿음을 두고 회화, 조각, 건축, 패션, 인테리어 디자인, 영상, 음악, 그래픽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미래주의적 실험을 남겼다. 그들은 심지어 미래주의 옷과 요리에 대한 선언을 시도했을 정도로 이탈리아의 전통 미술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해프닝적인 행위를 통해 과거의 미적 취향과 예술제작 과정을 타파하고자 애썼다. 미래주의자들은 19세기 이탈리아 미술이 전통적인 예술적 가치와 조형의식 때문에 퇴보했다는 의식을 바탕으로, 정치적 무정부주의와 젊음과 폭력을 옹호했다. 또한 산업도시와 자동차, 기차 등 산업혁명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도상들을 작품에 담았다. 그들은 사모트라케의 여신상보다 달리는 기차가 더욱 아름답다고 여겼으며, 도서관을 파괴하자는 구호를 거리낌 없이 외쳤다
마리네티(Filippo Marinetti)가 1909년 2월 5일 <라 가제타 델레밀리아(La gazzetta dell'Emilia)>에 미래주의 선언을 출판하고, 이후 프랑스의 <르 피가로(Le Figaro)>(1909년 2월 20일)에 다시 이를 재출판하면서 미래주의는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움베르토 보치오니(Umberto Boccioni), 칼를로 카라(Carlo Carrà), 지노 세베리니(Gino Severini)가 미래주의에 동참했고, 소음(noise)도 음악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 작곡가 루이지 루솔로(Luigi Russolo)도 이 운동에 참여했다. 그들은 미술관, 도서관 등을 비롯한 제도권을 비판했으며, 과학과 테크놀로지를 신봉하였다.
현대문명과 기술을 찬양한 급진적 미술
미래주의자들은 파괴와 폭력을 사회적 발전의 기치로 삼았지만, 동시대의 이탈리아 정치와 문화에 대한 관심과 비판에서 태동했던 아방가르드 흐름이었다. 미래주의는 다다(Dada)와 러시아 구축주의(Constructivism)에 영향을 미쳤지만, 추상미술의 전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피카소의 입체주의(Cubism)에 비해 오랫동안 저평가되었다. 이러한 저평가는 미래주의 미술가들이 일부 이탈리아 파시스트였던 무솔리니와 손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