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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 광산촌의 화가 황재형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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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 광산촌의 화가 황재형

오렌지 향기 2011. 4. 4. 10:19

 

 

 

                                                          삶의 무게


황 재 형 - 1952년에 출생, 중앙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했다. 탄광촌 기행을 하면서
‘황지연작’을 통해 두각을 드러내면서 임술년창립전(1982), 시대정신전(1983) 등
사회적 의식이 강한 동인전에 참여해 왔다. 1987년과 1991년의 개인전을 통해
탄광촌의 깊숙한 현장과 인간 풍경들을 발표하였다. 80년대 초 정동탄광, 사북탄광
등에서 광부로서의 삶을 살았다. 이십년 가까이 태백에 살고 있다.



멈추어진 시간



기다림


“나는 과거에 다짐한 바 있다. 불편한 잠자리를 자는 사람들에게는 안락과 휴식을
주는 그림을, 편안하고 답답한 일상에 젖은 사람들에게는 불편함과 경각심을 느끼게
하는 그림을 그리겠다고. 그것이 내가 가야할 길이라고. 나는 시각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림에서 진정성이 제대로 구현될 때 시각적 아름다움은 자연스레
따라 온다고 생각한다.” - 황재형



고 목



비탈길



세발자전거


“한 3년은 막장에 들어가 탄을 캐는 광부 생활을 했습니다.
그때 충격을 받았어요. 언제 무너질지도 모르는 부실한
갱이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술도 마시고 잠도 자더라고요.
갱목이 무너질 때는 ‘휘이’하고 휘파람 같은 소리가 납니다.
그때 빨리 대피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는 거지요.” - 황재형



삼수령



새벽눈



쌍굴다리 퇴근시간


“행복한 삶만 삶이 아니다. 불행 속에도 안정이 있고
산다는 것 자체가 희망이라는 생각을 배웠습니다.
무조건 변혁과 투쟁을 외치는 운동권 사람들과 생각을
달리하게 됐지요.” - 황재형



어머니



월급날



접시꽃


“좌파니 우파니 하는 이념은 어린아이 눈물 한 방울만큼의
가치도 없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삶의 진정성이고 사람들
사이의 진실한 교감입니다. 지금 우리가 힘든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자식들은 서로 교감하는 세상에서
잘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 황재형



In my heaven



퇴근 버스



저녁에


“어린아이의 눈과 마음을 살려주는 것이 가장 좋은 그림 교육이다.
예술이란 인간의 삶에 봉사하기 위한 것이다”- 황재형



슬레이트와 화분



식 사



저당 잡힌 풍경


“탄광촌을 막장이라고만 할 수는 없어요. 서울이 막장일 수도 있습니다.
비록 탄광촌이 막장을 상징화하지만, 나는 특정 장소의 특수성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예요. 우리가 인간으로 서 있는 각자의 위치에서
느낄 만한 소외와 공허함을 드러내고 싶은 겁니다.” -황재형



다알리아



탄천의 노을



탄 길


“그동안 내가 아이들을 가르쳤던 교육이 그들의 영혼을 짓밟았던
것에 다름 아니었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황재형



앰뷸런스


“거 참 잘 그렸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어느 지물포
아저씨가 황재형의 작품을 보고 한 말이다. 유홍준은 글에서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황재형의 태백 화실에 가서 <앰뷸런스>라는 제목의 작품을
구입했다고 쓰고 있다. 그리고 솔직히 아내가 고른 그 그림이 맘에 들지
않았다고 했다. 작품은 저녁 즈음에 앰뷸런스 한 대가 불빛을 밝히며
산길을 지나고 있는 풍경을 그린 것이다. 앰뷸런스 옆으로 보이는 숲은
마치 요동치는 듯한 움직임으로 사태의 심각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태백에서 지물포를 운영하는 아저씨는 앰뷸런스가 울리면
그림에서처럼 자신의 마음이 격렬히 동요한다고 말했다.
“당신은 서울사람이지.… 당신은 몰라. 저녁나절에 앰뷸런스가 울리면
세상이 이렇게 보인다구. 산천초목이 흔들리구, 쥐죽은 듯이 조용하구.
나는 광부생활 20년 하구 이 가겟방 하며 사는데 지금두 이런 때면
소름이 돋아요. 제일 싫다구.” 이 일화를 전하면서 유홍준은 스스로가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했다. 자신의 미학적 척도로 황재형의 작품을
평가했던 것을 말이다. - 이선희 기자 (Art in Culture)



황재형


스스로 탄광으로 간 화가의 삶은 성자처럼...

- 김병종(화가ㆍ서울대 미대교수)

그림보다도 아름다운 광부화가의 삶이여!
나는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폴리네시아로 가서 영원히 살기로. 그렇게 하면….
내일의 일, 그리고 지긋지긋한 이 바보 같은 싸움을
이제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폴 고갱

하늘 밝은 동네, 태백으로 가는 밤기차입니다. 흩날리는 눈발 속에
천지는 오직 흑과 백입니다. 싸늘한 달빛의 눈덮인 고원을 기차는
외로운 들짐승처럼 달립니다.

검은 땅의 창자를 흘러내린 희부윰한 물줄기가 끝나면서부터는
백두대간의 중추로 가는 오르막이어서 고한, 추전역을 지날 때에는
숫제 하늘 사다리라도 타고 올라가는 느낌입니다.

스쳐가는 역사의 불빛이 번쩍거릴 때마다 눈발 속에 탄가루도 함께
흩날리는 듯합니다.

스무 해 전에 황지로 떠났던 화가 한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삼십대의
초반에 화단의 기대와 조명을 한 몸에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일찍이
고갱은 원시의 아름다움을 찾아 타히티로 떠났지만 우리의 화가는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은 검은 땅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검은 바람 검은 흙의
그 곳으로 떠난 뒤 다시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무엇이 화가를 그 땅으로 불러들였을까요. 아니 예술가는 때때로 왜
밝고 빛나는 처소보다는 어둡고 쓸쓸한 곳으로 찾아가는 것일까요.
탄광촌으로 갔던 반 고흐는 그 곳에서 불세출의 명작이 된
‘감자를 먹는 광부가족’이라는 그림을 그린 바 있습니다. 그 그림은 가난과
어두움이 위대한 아름다움이 될 수 있음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탄광촌으로
떠났던 우리의 화가 그림에서도 그런 묵직한 감동이 전해져 옵니다. 아니
그림보다 먼저 그의 삶 자체가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생활이 그대를 속이더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는 액자가 걸려 있는
시골 다방에서 나는 최후의 민중미술가의 한 사람으로 기억될 화가와
마주 앉았습니다.

몇 년 동안이나 자르지 않았는지 수염이 목까지 덮어버린 그의 모습에서는
얼핏 성자와 같은 느낌이 전해져 옵니다. 허다한 사람들이 도시에서 비좁고
이기적인 삶에 급급해 있을 때 가장 열악한 삶의 조건 속에 내팽개쳐진 힘없는
사람들 편으로 다가가려 했다는 점에서 풍겨지는 분위기일 것입니다.

“70년대 후반부터 소재를 얻기 위해 탄광촌에 드나들었는데 어느 날 문득
더 이상 관찰자로서만 그곳을 기웃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 길로 짐을 싸서 황지로 가는 열차를 탔습니다. 제대로 광부를 그리기
위해서는 내 스스로 광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백, 정동, 구절 탄광
등을 전전하며 본격적인 광부 생활을 시작했지요.”

말은 쉽지만 도저히 실천하기 어려웠을 일들을 그는 남의 얘기하듯 무덤덤하게
전해 주었습니다.

“서울을 떠나기 전 나는 거의 기진맥진해 있었습니다. 허구한 날 술판과 토론이
이어지던 인사동 같은 곳이 아닌, 보다 가열한 삶의 체험이 녹아있는 현장이
아쉬웠습니다. 황지는 그런 내게…… 구원의 땅이었습니다.”

그림 때문에 찾아간 그 ‘구원의 땅’에서 그러나 그는 한시도 눈물 마를 새가
없었습니다. 비단 사흘이 멀다 하고 어깨와 양손의 살껍질이 벗겨져 나가는
고된 광부생활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동료 광부들의 너무도 가슴 아픈 현실들
앞에서 느낀 뼈저린 무력감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붓은 칼이 되지 못했습니다.

낮 동안의 고된 노역에서 벗어나 희미한 알전구 아래서 붓질을 하다가 붓을
던져 버리기 몇 차례였는지 모릅니다. 그곳에서는 종종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
자체가 너무도 호사한 일로 생각되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스물여덟 꽃다운 나이에 분신자살을 해야 했던 동료 광부 성환 열사의
노제를 준비하면서, 척추가 썩어 한 사발씩이나 고름을 받아내야 했지만
방치된 채 죽음을 기다리던 광부의 딸 희숙이를 돌보면서 그는 종종
화가이기보다는 고통의 사제 역할을 자임해야 했습니다.

지난 91년, 탄광으로 떠난 지 10년만에야 이루어진 그의 작품전은 그래서
그 뜻이 각별한 것이었고 보는 사람마다에게 진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동료광부와 그 가족들이 태백에서 일부러 서울까지 와서 전시를 축하해
주었을 때 그는 뜨거운 눈물을 쏟았습니다.

간첩으로 몰린 아내가 한밤중 이불을 뒤집어쓰고 혼자서 태백사투리를
연습하던 일, 고한의 ‘삶의 벽’에 탄광촌의 이야기를 공동제작의 벽화로
그렸던 일, 광부의 처우 개선 문제로 수없이 기관을 들락거렸던 일 같은
자신의 반생이 흡사 걸개그림 위의 그림처럼 스쳐갔던 것입니다.

그와 작별하고 눈발 날리는 어두워진 거리로 나왔을 때는 텅 빈 거리에
쓸쓸함의 기운만이 사면에서 불어왔습니다. 커다란 탄맥들이 발견되면서
한때 이 작은 도시에는 수백 개의 음식점과 주점들이 북적댈 만큼 성시를
이룬 적이 있었지만 석탄 경기가 사양으로 치닫고 폐광이 속출하면서 이제
어두움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도시가 되고 말았습니다.

뎅겅뎅겅 종소리가 울리는 저만치 허공에서 십자가 불빛 하나가 보입니다.
세상 어딘가에서는 어김없이 하루에 세 번 삼종이 울리고 그 세 번째 종소리에
만도를 드린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나는 밀레의 그림 속에서처럼 어두운 길가에 서서 고개를 숙였습니다.
주여, 이 검은 땅 검은 거리에 더 많은 축복과 은총을 내려 주소서.
더 많은 은혜를 내려 주소서. 다시 화가의 붓을 통해 힘과 아름다움이
함께 일어서게 하소서. 그리하여 곤고한 삶들일 망정 진실로 함께 열어가는
‘밝은 뫼’의 ‘하늘 동네’가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