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om Now On...
Pilgrim at Tinker Creek / Annie Dillard / 본문
현재를 함께하는 든든한 동반자 플라타너스
I am sitting under a sycamore by Tinker Creek.
나는 팅커 냇가에 있는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 앉아 있다.
It is early spring, the day after I patted the puppy.
초봄이고, 강아지를 어루만진 다음 날이다.
I have come to the creek---the backyard stretch of the creek---in the middle of the day, to feel the delicate gathering of heat, real sun's heat, in the air, and to watch new water come down the creek.
나는 한낮에 팅커 냇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뒤뜰 쪽으로 뻗어 있는 팅커 냇가로 왔다. 섬세하게 모여있는 열기, 진짜 태양의 열기를 공기 중에 느껴 보고, 새 물이 냇가 아래로 흘러가는 것을 보기 위해서이다.
Don't expect more than this, and a mental ramble.
이 이상을 기대하지는 마라. 이건 그냥 정신적인 산책이다.
I'm in the market for some present tense; I'm on the lookout, shopping around, more so every year.
현재 시제로 말하면 나는 시장에 와 있다. 조심조심 이리저리 쇼핑한다. 내년 더 많이 사게 된다.
It's a seller's market---do you think I won't sell all that I have to buy it?
판매자에게 유리한 시장이다. 당신은 내가 시장에서 사들이기 위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팔지 않으리라 생각하는가?
Thomas Merton wrote, in a light passage in one of his Gethsemane journals: "Suggested emendation in the Lord's Prayer.
토마스 머튼은 <갯세마네 일기> 가운데 어느 짧은 구절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주기도문에 대한 교정을 제안한다.
Take out 'Thy Kingdom come' and substitute 'Give us time!'"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시고' 를 빼고 대신 '우리에게 시간을 주옵시고!' 라고 할 것."
But time is the one thing we have been given, and we have been given to time.
그러나 시간은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것이며, 사실 시간에게 주어진 것은 우리다.
Time gives us a whirl. 시간은 우리에게 소용돌이를 선사한다.
We keep waking from a dream we can't recll, looking around in surprise, and lapsing lack, for years on end.
기억할 수 없는 꿈에서 깨어나 놀란 채 주변을 돌아보면 어느새 우리는 이미 흘러간 시간 속에 되돌아와 있다.
All I want to do is stay awake, keep my head up, prop my eyes open, with toothpicks, with trees.
나무와 이쑤시개로 감기는 눈을 억지로 열고 머리를 떠받쳐 깨는 것이 내가 하고 싶은 전부이다.
Before me the creek is seventeen feet wide, splashing over random sandstone outcroppings and scattered rocks.
내 앞에 있는 개울은 폭이 5미터인데 아무렇게나 튀어나온 사암과 흩어져 있는 바위에 물을 튀기고 있다.
I'm lucky; the creek is loud here, because of the rocks, and wild.
나는 운이 좋다. 바위 때문에 이 지점에서 개울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세게 흐른다.
In the low water of summer and fall I can cross to the opposite bank by leaping from stone to stone.
여름과 가을에 물살이 낮을 때면 나는 돌다리를 껑충 뛰어서 반대편 강둑으로 건너갈 수가 있다.
Upstream is a wall of light split into planks by smooth sandstone ledges that cross the creek evenly, like steps.
강 상류에서는 마치 계단처럼 고르게 냇물에 걸쳐 있는 매끄러운 바위턱 주변으로 부서지는 빛이 벽을 이룬다.
Downsteam the live water before me stills, dies suddenly as if extinguished, and vanishes around a bend shaded summer and winter by overarching tulips, locusts, and Osage orange.
강 하류의 살아 있는 물이 내 앞에서 잠잠해지더니 마치 소멸된 것 같이 갑자기 죽어 버린다. 그리하여 지나칠 정도로 휘어져 아치를 이루던 튤립나무, 아카시아, 오세이지오렌지 나무가 여름과 겨울 내내 그늘을 드리웠던 주변에서 물이 사라져 버린다.
Everywhere I look are creekside trees whose ascending boles against water and grass accent the vertical thrust of the land in this spot.
내 눈길이 닿는 모든 곳에는 냇가 옆에 나무가 있다. 냇물과 풀 위로 솟아있는 나무줄기는 이 지점에서 땅이 느끼는 수직적 충동을 강조해주고 있다.
The creek rests the eye, a haven, a breast; the two steep banks vault from the creek like wings.
냇물은 눈을 멈추게 하는 피난처요 따뜻한 가슴이다. 가파른 두 강둑이 냇물에서 튀어 오르고 있다.
Not even the sycamore's crown can peek over the land in any direction.
플라타너스 나무 꼭대기조차 어느 방향으로든 땅을 엿보지 못한다.
My friend Rosanne Coggeshall, the poet, says that "sycamore" is the most intrisically beautiful work in English.
시인인 내 친구 로잔 코기셜은 영어에서 본질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단어는 "시카모"라고 말한다.
This sycamore is old; its lower bark is always dusty from years of flood waters lapping up its trunk.
이 플라타너스 나무는 오래되었도 몸통으로 찰싹찰싹 밀려오는 수년간의 강물로 인해 아랫부분의 나무껍질은 언제나 먼지투성이다.
Like many sycamores, too, it is quirky, given to flights and excursions.
다른 많은 플라타너스 나무들처럼 이 나무도 변덕스러워서 도망도 치고 탈선도 했다.
Its trunk lists over the creek at a dizzying angle, and from that trunk extends a long, skinny limb that spurts high over the opposite bank without branching.
나무 몸통은 아찔한 각도로 냇물 쪽으로 기울어 있는데 그 몸통에서는 그리 크지 않은 가늘고 긴 가지가 뻗어 나왔다. 가늘고 긴 가지들은 반대쪽 강둑 위로 높이 마구 솟아 있다.
The creek reflects the speckled surface of this limb, pale even against the highest clouds, and that image pales whiter and thins as is crosses the creek, shatters in the riffles and melds together, quivering and mottled, like some enormous primeval reptile under the water.
냇물은 이 가느다란 가지의 얼룩진 표면을 비추어 준다. 가지들은 제일 높이 있는 구름과 비교해서도 창백하고, 강 건너 물여울 속에서 흩어졌다가 다시 합쳐지거나, 혹은 수면 아래에 있는 거대한 원시 파충류처럼 강물에 얼룩을 만들면서 떨곤 한다. 그럴 때면 그 가지의 모습은 더욱 창백해지고 가늘어진다.
I want to think about trees. 나는 나무들에 대해 생각하고 싶다.
Trees have a curious relationship to the subject of the present moment.
나무는 현재 순간의 주체와 이상한 관계를 맺고 있다.
There are many created things in the universe that outlive us, that outlive the sun, even, but I can't think about them.
이 우주에는 우리보다 더 오래 살고 심지어 태양보다도 더 오래 사는 많은 피조물들이 있지만 그것들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하겠다.
I live with trees. There are creatures under our feet, creatures that live over our heads, but trees live quite convincingly in the same
나는 나무와 더불어 산다. 우리 발 아래에도 생물들이 살고 우리 머리 위에도 생물들이 살지만, 나무는 우리가 마시는 공기와 같은 공기를
filament of air we inhabit, and, in addition, they extend impressively in both directions, up and down, shearing rock and fanning air, doing their real business just out of reach.
호흡하면서 꽤 믿음직스러운 모습으로 살고 있다. 게다가 나무는 인상적이게도 양 방향, 즉 아래위로 뻗어 있으며, 바위를 가르고 공기를 부채질한다. 나무는 우리 영역 밖에서 진짜 그들만의 일을 보면서 살고 있다.
A blind man's idea of hugeness is a tree.
눈먼 사람이 거대함에 대한 개념을 가진다면 바로 나무이다.
They have their sturdy bodies and special skills; they garner fresh water; they abide.
나무에겐 튼튼한 몸과 특수한 기술이 있다. 나무는 신선한 물을 머금고는 참고 견딘다.
This sycamore above me, below me, by Tinker Creek, is a case in point; the sight of it crowds my brain with an assortment of diverting thoughts, all as present to me as these slivers of pressure from grass on my elbow's skin.
팅커 샛강 근처 내 아래쪽으로 보이는, 나보다 큰 이 플라타너스 나무가 바로 그런 경우다. 그 플라타너스 나무의 모습은 기분을 전환시키는 생각들로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며 그 생각들은 풀이 내 팔꿈치 살갗을 누르는 이 미세한 압력만큼이나 내게 실재한다.
I want to come at the subject of the present by showing how consciousness dashes and ambles around the labyrinthine tracks of
의식이 미로와도 같은 마음의 행로로 돌진했다가 천천히 거닐면서, 짧은 순간이라도 되풀이해서 감각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the mind, returning again and again, however briefly, to the senses: "If there were but one erect and solid standing tree in the woods, all creatures would go to rub against it and make sure of their footing."
보여 줌으로써, 현재의 주체와 만나기를 나는 원한다. "만약 숲에 똑바로 견고하게 서 있는 나무가 딱 한 그루라면, 모든 생명들이 그 나무에 대고 몸을 비비면서 자신들의 발판을 확고히 할 것이다."
But so long as I stay in my thoughts, my foot slides under trees; I fall, or I dance.
하지만 내 생각 속에만 머무는 한, 나는 나무 아래서 발이 미끄러져 넘어지거나 춤을 추게 되리라.
Sycamores are among the last trees to go into leaf; in the fall, they are the first to shed.
플라타너스 나무는 가장 늦게 잎이 돋는 나무 중 하나이다. 그리고 가을이면 플라타너스 나무의 잎이 가장 먼저 진다.
They make sweet food in green broad leaves for a while---leaves wide as plates---and then go wild and wave their long white arms.
플라타너스 나무는 접시처럼 넓적한 널따란 초록 이파리에서 맛있는 영양분을 취한 뒤, 야생적 본능으로 희고 긴 제 팔을 흔들어 댄다.
In ancient Rome men honored the sycamore---in the form of its cousin, the Oriental plane---by watering its roots with wine.
고대 로마에서는 사람들이 플라타너스 뿌리에 포도주를 뿌림으로써 나무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Xerxes, I read, "halted his unwieldly army for days that he might contemplate to his satisfaction" the beauty of a single sycamore.
내가 읽은 바에 의하면 크세르크세스 황제는 한 그루 플라타너스 나무가 지닌 아름다움을 "만족할 만큼 성찰하기 위해 며칠 동안이고 자신이 거느린 거대한 군대를 멈추었다."
You are Xerxes in Persia. 당신이 페르시아에 살았던 크세르크세스 황제라고 가정해 보자.
Your army spreads on a vast and arid peneplain.......you call to you all your san captains, and give the order to halt.
당신의 군대는 광활하고 건조한 평원에 펼쳐져 행군하고 있고 당신은 슬픈 낯빛의 장교들을 소환하여 멈추라는 명령을 한다.
You have seen the tree with the lights in it, haven't you?
당신은 빛이 깃든 나무를 보았다.
You must have. 당신은 분명히 그것을 보았을 것이다.
Xerxes buffeted on a plain, ambition drained in a puff.
크세르크세스 황제는 평원에서 풍파를 겪었고 그의 야망은 바람 속에 시들어 버렸다.
That fusillade halts any army in its tracks.
빛의 일제 사격이 행군하던 군대를 멈추게 했다.
Your men are bewildered; they lean on their spears, sucking the rinds of gourds.
당신의 부하들은 어리둥절하다.
There is nothing to catch the eye in this flatness, nothing but a hollow, hammering sky, a waste of sedge in the lee of windblown rocks, a meager ribbon of scrub willow tracing a slumbering watercourse.....and that sycamore.
이 평평한 곳에서 눈에 띄는 아무것도 없다. 눈앞에 있는 거라곤 쾅쾅 소리가 들려오는 텅 빈 하늘과 바람에 시달린 바위가 마련해 준 피난처 속의 황폐한 사초들, 잠들어 있는 물살을 더듬으며 드문드문 서 있는 작은 버드나무....그리고 그 플라타너스 나무뿐이다.
You saw it; you still stand rapt and mute, exalted, remembering or not remembering over a period of days to shade your head with your robe.
그런데 당신은 그 나무를 보았다. 당신은 강렬한 기분에 사로잡혀 넋이 나간 채 말없이 서 있다. 당신 옷자락으로 당신 머리를 가렸던 나날들을 떠올리거나 혹은 그저 멍하니 서 있다.
"He had its form wrought upon a medal of gold to help him remember it the rest of his life."
"그는 남은 생애 동안 그것을 잊지 않을 요량으로 금으로 만든 메달에다 그 형태를 새겨 넣었다."
Your teeth are chattering; it is just before dawn and you have started briefly from your daze.
당신의 치아가 딱딱 맞부딪히고 있다. 새벽이 밝아 오기 직전이다. 당신은 멍한 상태에서 깨어나 재빨리 할 일을 시작한다.
"Goldsmith!" The goldsmith is sodden with sleep, surly.
"대장장이!' 대장장이는 잠에 흠뻑 취해 뚱한 모습이다.
He lights his forge, he unrolls the dusty cotton wrapping from his half-forgotten stylus and tongs, he waits for the sun.
그는 대장간에 불을 피우고, 반쯤 잊고 지냈던 철필과 인두를 말아 둔 먼지 자욱한 면포를 펼친다. 그런 다음 태양이 떠오르기를 기다린다.
We all ought to have a goldsmith following us around.
우리는 언제나 대장장이를 대동하고 다닐 필요가 있다.
But it goes without saying, doesn't it, Xerxes, that no gold medal worn around your neck will bring back the glad hour, keep those lights kindled so long as you live, forever present?
하지만 당신 목에 걸려 있는 어떤 금메달도 당신이 영원한 현재를 사는 동안 누렸던 그 환희의 시간을 되돌리지 못하고, 한 번 밝힌 빛을 보존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지 않은가 크세르크세스 황제여.
Pascal saw it. He grabbed pen and paper; he managed to scrawl the one word, FEU; he wrote that scrap of paper sewn in his shirt the rest of his life.
파스칼도 보았다. 그는 펜과 종이를 집어 들어 간신히 불이라는 한 단어를 휘갈겨 썼다. 그런 다음 남은 생애 내내 그는 자기 셔츠에 그 종이 조각을 꿰매 다녔다.
I don't know what Pascal saw. I saw a cedar. Xerxes saw a sycamore.
나는 파스칼이 무엇을 보았는지 모른다. 나는 삼나무 한 그루를 보았고 크세르크세스 황제는 플라타너스 나무 한 그루를 보았다.
These trees stir me. The past inserts a finger into a slit in the skin of the present, and pulls.
이 나무들이 나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과거가 현재의 거죽에 뚫린 구멍에 손가락 하나를 끼워 넣어 끌어당기고 있다.
I remember how sycamores grew---and presumably still grow---in the city, in Pittsburgh, even along the busiest streets.
나는 플라타너스 나무가 어떻게 피츠버그 같은 도시에, 그것도 심지어 가장 붐비는 도로변에 자라는지(아마 지금도 자라고 있으리라)모르겠다.
I used to spend hours in the backyard, thinking God knows what, and peeling the mottled bark of a sycamore, idly, littering the grass with dried lappets and strips, leaving the tree's trunk at eye level moist, thin-skinned and yellow---until someone would catch me at it from the kitchen window, and I would awake, and look at my work in astonishment, and think oh no, this time I've killed the sycamore for sure.
나는 하느님이 무엇을 알고 계신가 생가하면서 플라타너스 나무의 얼룩덜룩한 나무껍질을 하릴없이 벗기고, 마른 껍질 조각과 늘어진 살점을 풀밭에 던지면서 오후를 보내곤 했다. 그리고 내 눈높이에 있는 촉촉하고 껍질이 무른 노란색 나무 몸통은 내버려두었다. 누군가가 부엌 창문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을 느끼고는 깜짝 놀라면서 깨어나 내가 한 짓을 바라보면서 '저런, 이번에는 내가 플라타너스 나무를 죽이고 말았구나.'라고 생각할 때까지 그러고 있었다.
Here in Virginia the trees reach enormous proportions, especially in the lowlands on banksides.
여기 버지니아에서는 나무가 엄청난 크기로 자란다. 특히 강둑의 저지대에서 그렇다.
It is hard to understand how the same tree could thrive both choking along Pittsburgh's Penn Avenue and slogging knee-deep in Tinker Creek.
어떻게 똑같은 품종의 나무가 한쪽에서는 피츠버그의 헨 가를 가득 메우면서 번성하고 한쪽에서는 무릎 깊이까지 오는 팅커 냇물과 겨루면서 번성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Of course, come to think of it, I've done the same thing myself.
그러고 보니, 나도 그와 똑같다.
Because a sycamore's primitive bark is not elastic but frangible, it sheds continously as it grows; seen from a distance, a sycamore seems to grown in pallor and vulnerability as it grows in height; the bare uppermost branches are white against the sky.
플라타너스 나무의 윈시적인 껍질은 탄력성이 떨어지고 약하기 때문에 자라면서 끊임없이 떨어져 나간다. 멀리서 보면 플라타너스 나무는 높이 자랄수록 창백해지고 쉽게 상처를 입을 것처럼 보인다. 제일 위에 있는 헐벗은 가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하얗게 빛났다.
The sky is deep and distant, laced with sycamore limbs like a hatching of crossed swords.
하늘은 깊고 멀다. 교차된 검들이 그려 낸 가느다란 선처럼 보이는 플라타너스 나뭇가지가 하늘가를 장식하고 있었다.
I can scarcely see it; I'm not looking I don't come to the creek for sky unmediated, but for shelter.
하늘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나는 하늘을 쳐다보지 않는다. 하늘을 보려고 냇가로 오는 것이 아니라 피난처를 찾으러 온다.
My hack rests on a steep bank under the sycamore; before me shines the creek---the creek which is about all the light I can stand---and beyond it rises the other bank, also steep, and planted in trees.
가파른 강둑 위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 등을 뉘엇다. 내 앞으로는 강물이 빛나고 있다. 내가 견딜 수 있을 정도의 빛으로 가득 한 강. 그리고 그 강 너머에는 마찬가지로 가파르고 수목이 자라는 반대편 강둑이 보인다.
I have never understood why so many mystics of all creeds experience the presence of God on mountaintops.
어째서 모든 교파들의 그 많은 신비주의자들이 산꼭디기에서 하느님의 실재를 경험하는지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
Aren't they afraid of being blown away?
그들은 불려 날아가는 것을 겁내지 않았나?
God said to Moses on Sinai that even the priests, who have access to the Lord, must hallow themselves, for fear that the Lord may break out against them.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과 직접 소통하는 성직자들도 하나님이 자신들을 파괴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느끼고 스스로 정결하게 해야 한다고 하셨다.
This is the fear. 이것이 두려움이라는 것이다.
If often feels best to lay low, inconspicuous, instead of waving your spirit around from high places like a lightning rod.
우리는 흔히 높은 곳에서 자신의 영혼을 피뢰침처럼 흔들어 대는 대신에, 낮게 엎드려 눈에 띄지 않게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느낀다.
For if God is in one sense the igniter, a fireball that spins over the ground of continents, God is also in another sense the destroyer, lightning, blind power, impartial as the atmosphere.
왜냐하면 만약 하나님이 불을 점화하는 존재, 대륙의 곳곳으로 질주하는 불덩이라면, 하나님은 또 다른 한편으로는 파괴하는 존재, 대기만큼이나 공평한 맹목적인 힘, 번갯불이기도 한 까닭이다.
Or God is one "G". 아니 하나님은 알파벳 G 이다.
You get a comforting sense, in a curved, hollow place, of being vulnerable to only a relatively narrow column of God as air.
그럴 경우 당신은 굴곡진 텅 빈 장소에 있으며, 하나님 앞에서는 당신이 공기처럼 연약한 존재라는 데 위로 받는다.
In the open, anything might happen.
열린 공간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Dorothy Dunnett, the great medievalist, states categorically: "There is no reply, in clear terrain, to an archer in cover."
위대한 중세학자인 도로시 더넷은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천명한다. "탁 트인 들판에서도 몸을 숨기는 궁수를 당해 낼 자는 없다."
Any copperhead anywhere is an archer in cover; how much more so is God!
도처에 숨어 있는 살무사는 몸을 숨긴 궁수이며, 신은 살모사보다 훨씬 전능하다.
Invisibility is the all-time great "cover"; and that the one infinite power deals so extravagantly and unfathomably in death---death morning, noon, and night, all manner of death---makes that power an archer, there is no getting around it.
불가시성이야말로 언제나 위대한 '가리개'이다. 죽음(아침, 정오, 밤의 죽음 등 모든 형태의 죽음)을 그토록 무자비하고 불가해한 방식으로 다루는 유일한 권능을 가졌기에 신은 범접할 수 없는 궁수가 된다.
And we the people are so vulnerable.
우리 인간은 그리도 취약한 존재다.
Our bodies are shot with mortality.
우리의 육신은 필멸이라는 이름의 총알을 맞았다.
Our legs are fear and our arms are time.
우리는 두려움과 유한한 시간으로 이루어진 존재들이다.
These chill humors seep through our capillaries, weighting each cell with an icy dab of nonbeing, and that dab grows and swells and sucks the cell dry.
섬뜩한 체액들은 우리의 모세혈관으로 흘러 각각의 세포들에 한 줌의 비존재를 싣는다. 이 차가운 한 줌은 점점 부풀고 자라나 우리 몸의 세포로부터 수분을 빨아들인다.
That is why physical courage is so important---it fills, as it were, the holes---and why it is so invigorating.
이렇듯 육체가 가진 용기는 우리의 빈 육신을 채워 주기 때문에 중요하고 우리에게 활력을 불어넣어 준다.
The least brave act, chance taken and passage won, makes you feel loud as a child.
기회를 포착하고 나아갈 길을 확보하는 최소한의 용감한 행동은, 어린아이가 가짐 직한 당당함을 느끼게 한다.
But is gets harder. 하지만 이 과정은 점점 더 힘겨워진다.
The courage of children and beasts is a function of innocence.
아이들과 짐승이 가진 용기는 순진무구함의 위력이다.
We let our bodies go the way of our fears.
우리는 우리의 육체가 우리가 지닌 두려움 앞에 굴복하도록 내버려 둔다.
A teen-aged boy, king of the world, will spend weeks in front of a mirror perfecting some difficult trick with a lighter, a muscle, a tennis ball, a coin.
스스로를 세상의 중심이라 생각하는 십대 소년은 라이터나 근육, 테니스 공, 동전 같은 것을 이용한 어려운 묘기를 숙달하느라 거울 앞에서 몇 주일이고 보낼 수 있다.
Why do we lose interest in physical mastery?
왜 우리는 신체를 통제하는 것에 흥미를 잃어버렸을까?
If I feel like turning cartwheels ---and I do ---why don't I learn to turn cartwheels, instead of regretting that I never learned as a child?
만약 옆으로 재주넘기를 하고픈 마음이 든다면(나는 지금 그런 마음이 든다)아이 때 배워 둘걸 하고 후회하지 말고, 지금 배우면 되지 않는가?
We could all be aerialists like squirrels, divers like seals; we could be purely patient, perfectly fleet, walking on our hands even, if our living or stature required it.
우리도 다람쥐와 같은 공중 곡예사가 될 수 있고 물개처럼 잠수할 수도 있다. 만약의 우리의 삶이나 능력이 요구한다면 우리도 강한 인내심을 가질 수 있고, 날래게 움직일 수 있으며, 손바닥으로 걸어 다닐 수도 있다.
We can't even sit straight, or support our weary heads.
하지만 우리는 똑바로 앉아 있지도 못하고 우리의 지친 머리를 제대로 가누지도 못한다.
When we lose our innocence---when we start feeling the weight of the atmosphere and learn that there's death in the pot---we take leave of our senses.
우리가 순진무구함을 잃게 될 때, 말하자면 공기의 무게를 느끼고 저 항아리 안에 죽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감각과 멀어진다.
Only children can hear the song of the male house mouse.
집 안에 사는 수컷 쥐가 부르는 노래는 아이들만이 들을 수 있다.
Only children keep their eyes open.
아이들만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볼 수 있다.
The only thing they have got is sense; they have highly developed "input systems," admitting all data indiscriminately.
아이들이 가진 유일한 것은 감각이다. 아이들은 '입력 체계'를 고도로 발달시켜 모든 정보들을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인다.
Matt Spireng has collected thousands of arrowheals and spearheads; he says that if you really want to find arrowheads, you must walk with a child---a child will pick up everything.
매트 스피렝은 수 천 개의 화살촉과 창끝을 수집했다. 그는 진심으로 화살촉을 찾고 싶으면 아이들과 같이 걸어야 한다고, 아이들은 별의별 물건을 집어 든다고 말했다.
All my adult life I have wished to see the cemented case of a caddisfly larva.
성인이 된 후 나는 교결된 날도래 벌레의 고치를 항상 보고 싶어했다.
It took Sally Moore, the young daughter of friends, to find one on the pebbled bottom of a shallow stream on whose bank we sat side by side.
얕은 개울의 자갈 깔린 바닥에서 그것을 발견하는 데에는 내 친구의 어린 딸인 샐리 무어의 도움이 컸다. 강둑에 나란히 앉았을 때 그 아이가
"What's this?" she asked. "이게 뭐예요?" 하고 물었던 것이다.
That, I wanted to say as I recognized the prize she held, is a memento mori for people who read too much.
아이가 들고 있는 귀중품이 무엇인지 알아차렷을 때 나는, "그건 책을 너무 많이 읽는 사람들을 위한"메멘토 모리 란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We found other caddisfly cases that day, Sally and I, after I had learned to focus so fine, and I saved one.
그날로부터 훌륭하게 집중하는 법을 배운 후, 샐리와 나는 다른 날고래 고치들을 찾았고 그중 하나를 집으로 가져왔다.
It is a hollow cylinder three quarters of an inch long, a little masterpiece of masonry consisting entirely of cemented grains of coarse sand only one layer thick.
고치는 2센티미터 길이의 텅 빈 원통 보양으로 거친 모래 알갱이들이 단단히 결합하여 두꺼운 한 층을 이루며 만들어 낸 작은 석조 걸작품이었다.
Some of the sand grains are red, and it was by searching for this red that I learned to spot the cases.
몇몇 모래 알갱이들은 붉은색을 띠었는데, 바로 이 붉은 색을 찾아냄으로써 나는 그 고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The caddisfly larva will use any bits it can find to fashion its house; in fact, entomologists have amused themselves by placing a naked larva in an aquarium furnished only with, say, red sand.
날도래 유충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사용하여 자기 집을 짓는다. 곤충학자들이 즐기는 놀이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먼저 붉은 모래로만 채워진 수족관에 맨몸의 유충을 넣는다.
When the larva has laid around its body several rows of red sand, the entomologist transfers it to another aquarium in which only white bits are available.
그 유충이 붉은 모래 대여섯 겹을 자기 몸에 발랐을 즈음 곤충학자는 이제 흰 모래만 담긴 다른 수족관에 그 유충을 옮긴다.
The larva busily adds rows of white to the red wall, and then here comes the entomologist again, with a third and final aquarium full of blue sand.
그러면 그 유충은 붉은벽에 흰색 줄을 더하느라 바쁘다. 다시 곤충학자는 마지막으로 푸른 모래로 가득한 세 번째 수족관을 가져온다.
At any rate, the point I want to make is that this tiny immature creature responds to an instinct to put something between its flesh and a jagged world.
어쨌건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다 자라지도 않은 이 작은 생물도 자신의 맨살과 이 들쭉날쭉한 세상 사이에 어떤 것을 놓기 위해 본능적으로 반응한다는 점이다.
If you give a "mason mosaic" kind of caddisfly larva only large decayed leaves, that larva, confronted by something utterly novel, will nevertheless bite the leaves into shreds and rig those shreds into a case.
만약 이 "돌 모자이크같이 생긴" 날도래에게 썩어가는 큰 이파리만 건넨다 해도, 그 유충은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과 대면했을 때처럼 그 이파리를 여러 조각으로 잘라 알집으로 가져갈 것이다.
The general rule in nature is that live thing are soft within and rigid without.
자연의 일반적 법칙 가운데 하나는 살아 있는 것들은 안이 부드럽고 밖이 딱딱하다는 것이다.
We vertebrates are living dangerously, and we vertebrates are positively piteous, like so many peeled trees.
우리 척추동물은 위험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껍질이 벗겨진 많은 나무들처럼 우리 또한 실제로 애처롭다.
This oft was thought, but ne'er so well expressed as by Pliny, who writes of nature, "To all the rest, given she hath sufficient to clad them everyone according to their kind: as namely, shells, cods, hard hides, pricks, shags, bristles, hair, down feathers, quills,
scales, and fleeces of wool.
이런 점은 흔히 지적되어 왔지만 플리니우스의 자연론만큼 이 점을 잘 표현한 글은 없다. "자연은 나머지 모든 생물체들에게는 종에 따라 충분한 입을 것을 주었다. 딱딱한 등딱지, 겉껍질, 단단한 가죽, 가시, 강모, 털, 부드러운 깃털, 깃, 비늘, 양털 같은 것들을.
The very trunks and stems of trees and plants, she hath defended with bark and rind, yea and the same sometimes double, against the injuries both of heat and cold: man alone, poor wretch, she hath laid all naked upon the bare earth, even on his birthday, to cry and wraule presently from the very first hour that he is born into the world."
그리고 나무와 식물의 줄기에는 껍질을 둘러 줌으로써 보호했다. 때때로 자연은 더위와 추위의 이중 폐해에 대비해 둘 이상을 주기도 했다. 반면 불쌍한 인간만은 태어날 때부터 헐벗은 땅에 완전히 맨몸으로 뉘였다. 아이는 세상에 태어나는 바로 그순간부터 즉시 울부짖는다."
I am sitting under a sycamore tree: I am soft-shell and peeled to the least puff of wind or smack of grit.
나는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 앉아 있다. 내 살같은 부드러워 아주 약한 미풍이 불거나 잔모래 냄새만 맡아도 벗겨진다.
The present of our life looks different under trees.
우리 삶의 현재가 나무 아래에서는 다르게 보인다.
Trees have dominion. I never killed that backyard sycamore; even its frailest inner bark was a shield.
나무가 지배한다. 나는 뒤뜰의 플라타너스 나무를 결코 죽이지 않았다. 가장 섬세한 안쪽의 껍질조차도 방패 역할을 한다.
Trees do not accumulate life, but deadwood, like a thickening coat of mail.
나무는 삶을 쌓아 두지 않는다. 그러나 시들어 죽은 나무는 두꺼운 쇠미늘 갑옷 같다.
Their odds actually improve as they age.나무의 우월함은 나이가 들수록 가치를 더한다.
Some trees, like giant sequoias, are, practically speaking, immortal, vulnerable only to another ice age.
거대한 세쿼이아 같은 나무는 실제로 죽지 않는다. 그 나무는 또 다른 빙하기가 도래할 때에만 약점을 드러낼 것이다.
They are not even susceptible to fire.
그런 나무는 심지어 불에도 잘 타지 않는다.
Sequoia wood barely burns, and the bark is "nearly as fireproof as asbestos.
세쿼이아 나무는 거의 불에 타지 않으며 그 껍질은 "석면처럼 불연성을 띤다.
The top of one sequoia, struck by lightning a few years ago during a July thunderstorm, smoldered quietly, without apparently damaging the tree, until it was put out by a snowstorm in October."
몇 년 전 7월에 폭풍우가 휘몰아쳤을 때 번개에 맞은 한 세쿼이아 꼭대기가 조용히 그을었다. 그러나 나무 전체는 분명 별다른 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다가 결국 10월의 눈보라를 맞고 불이 꺼졌다."
Some trees sink taproots to rock; some spread wide mats of roots clutching at acres.
어떤 나무의 받침뿌리는 바위도 부순다. 또 어떤 나무는 넓은 멍석 같은 뿌리를 뻗쳐 큰 평의 땅을 움켜쥔다.
They will not be blown. We run around under these obelisk-creatures, teetering on our soft, small feet.
그 나무들은 바람에도 꿈쩍 않는다. 우리는 조그맣고 부드러운 발로 흔들거리며 이 오벨리스크 같은 생명 주위를 빙 돈다.
We are out on a jaunt, picnicking, fattening like puppies for our deaths.
우리는 우리의 죽음에 대비해 소풍을 나온 것이고 강아지처럼 토실토실 살이 올라 있다.
Shall I carve a name on this trunk?
이 나무 몸통에 이름 하나를 새겨볼까?
What if I fell in a forest: Would a tree hear?
내가 숲에서 넘어지면 어떻게 될까? 나무가 그 소리를 들을까?
Capture The Moment - David London
Location Country: Ro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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